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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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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남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남건 호 : 성행/노헌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50년(철종 원년) 상세설명 자는 성행(聖行)이요 호는 노헌(魯軒)이니‚ 영의공(英毅公)의 후예인 영양군(英陽君 麗朝 重?匡都僉議贊成事)의 22세손이며‚ 감찰어사(監察御使)인 송정(松亭)공의 14세손이요 유기(有耆) 선생의 외아들로서 1850년(철종 원년) 영해부(寧涇府) 원구동(元邱?)에서 출생하여 중년에 석보면 지경동(地境?)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여 5세에 벌써 시를 지으니‚ 어느 비 개인날. 백부가 무지개를 바라보며 "네가 저 무지개를 보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말하니 그 자리에 꿇어 앉으며 묻기를 "운(韻)자를 무슨 자(字)로 할까요?" "뚫을 관(貫)자와 걸 괘(掛)자로 해라"이에 곧 시를 지어 응답하기를 청홍관일월하니 동남괘장궁이라(靑虹貫日月 東南掛長弓) (싱싱한 무지개가 해와 달을 꿰뚫어 동녘과 남녘에 긴 활을 걸어놓은 형상이구나) 백부가 어린 조카의 기상이 웅장하고 재동(才童)임을 기특히 여겨 심히 귀여워하였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열심히 글을 배우고 학문을 연구하여 공맹정주(孔孟程朱)의 유학(儒學)은 물론이려니와 태극 음양 오행(?極 陰陽 五行)의 역학(易學)에 이르기까지 정통(精通)한 석학(碩學)이었으며‚ 글을 잘 짓기로는 옛날의 높은 선비의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워낙 청빈(?貧)한 선비의 집안이라‚ 어버이를 봉양함에 몸소 산에 올라 뗄 나무를 베어 등에 지고 오며‚ 물고기를 낚아서 날마다 술과 안주를 3번씩 드리는데 어육(魚肉)의 새물은 값비싼 것을 불구하고 반드시 사서 공궤(供饋)하는 지극한 효성이었다. 1895년(고종 32년) 가을에 민비(閔?)가 왜적(倭賊)에 의해 시해(弑害)당했다는 흉보에 북쪽을 향하여 절하며 통곡하고 그 이듬해 2월에 왜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이 수악(李 壽岳)이 대장이 되고 그는 부장(副將)이 되어 전투하려 하였으나 조정(朝廷)에서 금령(禁令)이 내렸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해산(解散)하고 돌아 왔다. 1905년(고종 9년)에 조정에서 한일 협약(韓日協約 乙巳保護條約)을 체결(締結)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憤慨)함을 누를 길 없어 유명(有名)한 동해회고시(東涇懷古詩) 3수(三首)를 지었다. 1910년 음력 7월 한일 합방(韓日 合邦)됐다는 소문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온 종일 통곡할 제 눈물이 비오듯했다. 그날부터 나라가 망했다고 몽상(蒙喪)차림으로 백립(白笠)을 쓰니 34년 동안 종신(終身)토록 백립을 쓰고 지났으며 그날부터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섣달 열 여드렛날 회갑 날에 가족들에게 일체 연락(宴樂)을 못하게 하고‚ 평소에 애주하던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마음 아파하기 여느 날 보다 더 심하였다. 1943년(癸未) 음력 4월 25일 오후에 선생이 자손들을 불러모아서 유언(遺言)하기를 "내가 죽거든 상여(喪轝)에 물감(彩色)을 쓰지 말고 간소한 죽여(竹轝)로 운구(運柩)하되 널(棺)위에 대한 유민 남건지 구(?韓 遺民 南建之 柩)라고 써라."하였으니‚ 그 당시 이른바 황국 신민 서사(皇國 臣民 誓詞)를 제창(齊唱)하기를 강요한 왜정 말기 전쟁이 점점 패전으로 기울어 단말마적 발악(斷末魔的 發?)이 독사(毒蛇)같은 서슬에 대한유민(?韓遺民)이라 명정(銘旌)을 씀은 극히 위험한 거조(擧措)였었다. 임종(臨終)에 직면한 선생이 가족 한사람의 왼편 손바닥에 어질 인(仁)자를 쓰고 오른편 손바닥에 효도 효(孝)자를 써서 훈계하기를 "이 두자는 우리 가문 세전지 좌우명(世傳之 座右銘)으로서 너희들에게도 끼치는 바이니 이를 성실히 준행할 것이며 또한 너희 후손들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고 편안히 잠드는 듯이 운명(殞命)하니 향년(享年) 94세이다. 노헌(魯軒)선생은 독자로서 슬하에 4남 1녀와 많은 손자와 현손(?孫)까지 안아본 복로(福老)요 (평소 나라 잃은 슬픔으로 마음 아팠지만 자손들의 어른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초야(草野)에 묻힌 청렴한 선비로되 충효양전(忠孝兩全)하였으며‚ 송죽 같은 절의(節義)와 도덕 문장으로 대인격(?人格)을 이룬 인생사표(人生師表)의 거룩한 생애였었다. 노헌문집(魯軒文集) 13권이 있다. 별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껏 선생의 이름(諱啣)을 모르는 사람 중에도 남공자(南孔子)라는 존칭을 아는 이는 많다. 참고문헌 : 영영군지 魯軒先生文集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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