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노수신

추천0 조회수 64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노수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노수신 호 : 과회/소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광주 상세설명 자는 과회(寡?)요 호는 소재또는 이재(伊齋)라하며 또한 암실(暗室) 여봉산인(茹峰山人)이라 하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그는 활인서 별제(?人署 別提) 홍(鴻)의 아들로서 당대에 뛰어난 성리학자요 명신(名臣)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우뚝하여 어른과 같았으며 그의 나이 17세 때 탄수 이 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인 이 연경을 스승으로 하여 학문을 닦고‚ 나이 20에 박사(博士)에 올랐는데 함께 공부하던 인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의 초시(初試)를 비롯하여 그후의 회시‚ 전시의 세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하여 세상에서 삼괴선생(三魁先生)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1543년 29살 때 처음으로 성균관 전적에 취임한 이래 홍문과 수찬‚ 세자시강원사서‚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때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홍문관 교리로 복직였다. 1585년(선조 18년)에 그는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문의(文懿)라 시호가 내렸다가 다시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국가 장래를 생각하여 인재를 뽑아 쓸 것을 주창하고 이이(李?)‚ 이지함‚ 김천일(金千鎰)‚ 조묵‚ 민순(閔純)‚ 이산해(李山涇)‚ 허봉‚ 류몽학(柳?鶴)‚ 최영경(崔永慶)등 많은 인재를 조저에 추천하여 쓰게 하니 그야말로 백성을 위하고 앞 일을 내다보는 덕과 재주를 갖춘 대 정치가라 하겠다. 학문면에서는 수 천수(數千首)의 시(詩)‚ 부(賦)‚ 찬(撰)‚ 교서(敎書)‚ 서문(序文)‚ 소(疎)‚ 비갈명(碑碣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글이 있다. 그러나 전란으로 그의 저술한 책이 다 불타 버리고 나머지를 간추려 간행한 시9권과 문6권이 있을 뿐이다. 그의 학문은 항상 바르게 하여 품행을 닦는 것을 발판으로 삼고 자신이 몸을 닦은 후에 사물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질서로 삼았다.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고 옷과 음식은 검소하였으며 몸가짐 하나하나에 법도를 지켰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정직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나라의 걱정은 언제나 발전이 없는데서 일어난다고 하고 관리는 맡은 직무에 충실하고 나라가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또 예의 교육을 실시하여 좋은 풍속을 이끌어 나가는데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 그의 집 뜰에 상록수 열 종류를 심어 놓고 정자 이름을 십청정(十靑亭)이라고 이름하여 만년까지 푸른 절개를 높이 간직하였다. 그는 또한 주자학에도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보고 "동방에 공자의 길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육 상산(陸象山)‚ 왕 양명(?陽明)을 주로 했다고 주자학과로부터 공격을 받을 만큼 되기도 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휴정(休靜).선수(善修)등 승려들과 깊이 사귀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식(李植)은 도학자중 선학(禪學)을 겸한 것은 노수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거니와 그에 앞서 이 항(李?)은 노 수신이 불철저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자 임을 공격했고 그가 선학에 치우쳐져 있음을 비판했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여 모가 없었다. 남이 자기를 해치고자 하는 일로써 한번도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임금이 자기에 대한 은충이 과분함을 송구하게 생각하고 관직이 오를 때 마다 굳이 사양하였으며 정승이 되는 날 그는 안색이 변하고 근심이 가득 했었다고 한다. 그는 귀양 가있는 곳에서 효도하지 못함을 큰 죄로 생각하여 수 천리 길에 인편 마다 낚시로 잡은 고기를 봉양토록 보냈고 양친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가고져하니 임금이 그의 고향과 가까운 충청 감사로 임명한 적도 있었다. 또 한 평생에 정사로 인하여 효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돌아가실 때 "선영(先塋) 곁에 시묘 살던 곳에 장례하라"하니 그곳(상주군 화서면 원천)에 장사하였다. 이와 같이 노수신은 조선조에 국가의 앞길을 내다 보는데 정치가이며 한림 삼걸의 하나인 대 문장가이며 학문에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학자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었다. 그의 종택과 가묘는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으며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다. 영정은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에 있는 오현영각과 칠현영각에 가각 보존되어 있으며 봉산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