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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설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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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몽설부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몽설부부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밀양 박씨로 대덕 출신의 충신이다. 효용(사납고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장수감이라 남이 부러워 할 정도였다. 일찍이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중봉 조현 선생은 공을 처음 만나자 '대기로다!'하고 더욱 귀하게 여기는 바가 되었다. 공은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당시는 황간 현감으로 재직했다. 왜적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자 "나라에 녹값(봉급을 받은 값)을 하게 되었다!" 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죽기를 맹세하고 적을 맞아 싸웠으나 많은 적을 맞아 그만 사로잡힌 바가 되었다. 자결을 생각했으나 그렇게 죽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임을 알았지만 적이 강요하는 항복을 참는 일도 죽음만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 욕스러움은 꼭 갚아질 것이다!' 이를 갈며 탈출을 꾀하던 공은 밤을 타 황간 냉천에 몸을 던져 수중으로 영동 심천까지를 헤엄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동의 현감은 한명윤이었다. 두 현감은 의기가 서로 맞아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향해 전진해 갔다. 그러나‚ 적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 천하의 용사도 어찌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용전분투 한 명의 왜적이라도 더 무찌르려던 공은 황현감 및 40여명의 용사들과 같이 진주성 촉석루 아래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아마 이때는 1592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편집자 주) 공의 부부의 정려기를 쓴 송병선은‚ '공의 임전무퇴한 충절은 가히 고경명·김천일에 비해 무엇이 모자라랴!' 고 찬양하듯이 초인적인 힘을 내어 물길 수십리를 헤엄쳐 갔음도 다 적을 몰아내자는 일념에서였으니 향토가 낳은 위대한 충신이라 해서 조금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공의 부인 유씨도 남편의 장렬한 최후 소식을 듣자‚ "죽어서라도 하늘같은 남편을 섬기기라!" 하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니 충신과 열녀가 한 집안에서 났던 것이다. 이런 혁혁한 공의 충성과 열녀가 한 집안에서 났던 것이다. 이런 혁혁한 공의 충성과 부인도 정절도 늦게 나라에 알려져서 1882(고종 19)년에야 부부를 함께 정려를 내려며‚ "충신열녀지문"이라 극찬했다. 처음은 대덕 다화촌 앞에 정려문을 세웠다가 뒤에 후손이 중산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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