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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박영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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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영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영손 호 : 찬경/청풍당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422년(세종 4년) 상세설명 공의 자(字)는 찬경(贊敬) 호(號)는 청풍당(?風堂)이니 임금님께서 지어주신 호이다. 관(貫)은 밀양(密陽)이다. 1422년(세종 4년)에 연기현감(燕岐縣監) 순조(順祖)의 아들로 태어났다. 1460년(세조 6년)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39세였다 . 그 다음 해 봄에 성균관 전적의 벼슬에 승진되었고‚ 또 예조좌랑을 거쳐서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년) 4월에 삼공육경(三公六卿)들에게 명하여 특별히 시강무학(侍講文學)을 할 수 있는 선비들을 선출하라 하였는데 거기에 선출된 사람은 모두 10여명 중 공이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대체로 그들이 하는 일은 임금의 말씀이나 명령을 제작하고 언동을 기록하며 경서(經書)를 편찬하는 것인데 한결같이 집현전의 일같이 훌륭하였으므로 드디어 홍문관교리로 옮겼다. 일을 처리함에 공명 정대하고 사사로운 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임금님이 무척 사랑하고 아름답게 생각하여 여러 번 좋은 표창을 받았다. 당시 점필제 김종직( 畢薺 金宗直)선생과 함께 교대로 임금님이 거쳐하는 곳을 맡아보았는데 두 사람 모두 뜻이 같고 의리가 서로 통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나 책을 편찬하는 일에 뜻이 같았으므로 소인배들이 음흉하게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드디어 그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마침내 외적으로 내쳐져 황해도 풍천군수로 임명되어 임지에서 백성들 보살피기에 정성을 다하니 백성들은 태평을 누리게 되고 향교와 학교를 잘 다스리니 촉나라의 문옹이 풍습이 가득하였다. 마침 암행어사가 내려와 풍천군수의 정사를 잘 살펴보고 임금님께 보고하기를 청렴하고 밝고 깨끗하고 맑아서 얼음과 옥에 흠이 없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廉明?潔 水?無瑕) 라고 아뢰니 임금이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청풍당이란 호를 지어 주었다. 나이가 많고 쇄병하여 벼슬을 사절하고 영천 항(지금의 우항)에 물러나와 수석(水石)이 좋은 곳을 가려서 집을 짓고 책을 보는데 낙을 부쳐서 세월을 보내다가 그가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시종 한결같아 때때로 벗과 함께 지은 시편에 나타나 있다 .또 고을의 수재들이 글을 배우려 많이 찾아왔는데 공은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고 인도하며 진실하고 올 바른 학문을 지도하니 몰려드는 자가 많았다. 1486년(성종 17년) 봄에 65세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도승지 벼슬을 증직하였다. 그 후 13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어진 학자들이 많은 화를 입게 되고 그 제자와 옛 친구까지 화를 입게 되니 류자광(柳子光)이 연산군에게 상소하기를 "김 종직의 글은 후세상에 전하여지는 것이 옮지 못하니 모두 찾아서 불태워 없애 버리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연산군이 그 말을 옳게 생각하고 그 날로 그 글을 찾아 모아 빈청의 뜰에서 불태워 버리고 먼 지방에 흩어져 있는 것은 그 지방 관원에게 명령하여 불태우라고 했기에 이 때에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탄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공은 점필제 선생과 뜻과 일을 같이 하였다하며 공의 글을 사하로 수색하는데 연좌되어 다시 찾을길 없이 불속에 들어가고 독부사(獸賦辭)두편만이 다른 집에 흘러나가 있을 뿐‚ 나머지는 찾을 길이 없으니 그 자손들은 애통하고 한스러운 마음 그지 없을 것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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