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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박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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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박이장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이장 호 : 여장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624년(이조 2년) 상세설명 고을을 살며 재임 중에는 고향 사람들에게 덕을 베푸는 데 마음을 두어 사재를 쏟아 대야제를 이룩하여 한해를 막았고 만년에는 어릴 때 배움에 전력하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하며 뉘우쳐 만회헌이라 자호‚ 서당을 지어 형제와 더불어 학문에 힘썼던 이가 있었다. 그는 조선 초기 이조판서에 증직된 금은공 성양의 8세손인 박이장으로 자는 여장‚ 관향은 함양이며 1624년 갑자 2월 16일 금성면 대리동에서 태어났다. 네 살때 벌써 외모 단정‚ 성질 또한 밝고 명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장래성이 있을 것으로 점치게 했고‚ 일곱 살 때 또래와 장난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으며 하루는 마을에 나가 복숭아 두 개를 얻어 먹지 않고 품는 것을 이웃 어른이 보고 물으니 집에 가서 어버이에게 드린다고 하여 그 어른을 탄복하게 하였다. 차차 장성하매 행동은 배운 바에 따랐고 제자백가에 박통 18세에 이르러선 문장을 이루었다. 문무 겸전하였지만 뒤늦은 42세 을유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가 비변랑으로 옮겼고 4년 후 부사용‚ 48세 신해년엔 경상우병마우후‚ 김해 절제사‚ 통훈 대부 창원 부사를 제수받아 가서는 시정 8조목을 반포하여 3년간 선정을 펴매 고을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함경북병마우후를 거쳐 공주 영장이 된 뒤로 홀연히 마음이 움직여 환향 아버지 상을 맞아 슬퍼하기를 제도에 넘치게 했고‚ 3년복을 마친 뒤 기미년 56세엔 경원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허견을 토벌했다. 종성 부사를 지나 임술년 59세가 되어 중화 부사로 옮겨 이듬해 절충 장군 충무위 부호군이 되괴 연말에 귀향‚ 현 금성면 하동 소재 대야곡의 땅이 낮고 습해 한재때는 농사가 실농됨을 알고 주민 수백명을 동원하여 자기 녹봉을 덜어 주며 둑을 쌓아 대야제를 기공 3개월만에 완성하였다. 제하의 경작자들이 그 공적을 기려 보상하고자 "부사님‚ 소인들이 근농하여 하루 빨리 하해같은 은공을 갚고자 하나이다"했지만 "둑 막은 것은 대야곡의 한재가 심한 것을 없애 여러분 몽리민들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지 내 이익을 위한게 아니니 당치 않은 말을 거두오"하매 "그래도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어야지요"고 거듭 원하자 "이 후론 다시는 그런 말을 재론치 말아요"하고 사절했으므로 그들 경작민들은 세찬을 갖다 주어 그 덕을 기리고 제중에서 제수를 장만하여 그의 묘제시 제사를 지내주어 3백여 년 지금까지 이어온다. 그의 나이 갑년에 이 대야제를 이룩한 뒤 광양 절제사‚ 청남 수군방어사로 있다가 3년 뒤 평양 병마절제사로 옮기라는 것을 노명으로 사양 환향하여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 신미 10월 11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8이었다. 그의 큰 족적인 대야제는 현 의성‚ 탑리간 대로변 하동 385번지의 1로 유지 면적은 6‚901평이나 된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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