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박익(朴翊)

추천0 조회수 100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박익(朴翊)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박익(朴翊) 호 : 송은(松隱) 활동시기 : 고려시대 본 관 : 밀양 출생시기 : 1332년(충숙왕 복위 1년) 출 생 지 : 1332년(충숙왕 복위 1년) 시대 : 고려시대 상세설명 송은 박익(松隱 朴翊)선생은 고려말 충신(忠臣)이며 팔은(八隱)이고 두문동 72현의 한분이다 휘는 익(翊)이며 초명은 천익(?翊)이고 자는 태시(??)며 호는 송은(松隱)으로 전국 밀양박씨의 종손9宗孫)이며 은산부원군 영균(銀山府院君 永均)의 장자이다. 1332년(충숙왕 복위 1년)에 밀양 사포에서 태어났다. 1360년(고려 공민왕 9년)에 29세의 약관으로 입지잠(立志잠)을 지어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처음 뜻을 세워 반드시 성인과 철인에 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소감(少監)을 지내고 1386년(고려 우왕12년)에 동경판관(東京判官)으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8월에 정성상경하였다. 그후 한림문학(翰林文學)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겨 중서령(中書令)을 겸하였다. 또 무예도 뛰어나 일찍 남정북벌(南征北伐)하였으니 상장 박익(上將 朴翊) 아장 강준중(亞將 ?准仲 호는 通溪) 등 고기록(古記錄)에 이 강 통계공(? 通溪公) 유집(遺集)에 나타나 있다. 때에 위화도 회군을 강행한 이성계(李成桂)는 팔도 도통사 최영(八道 都統使 崔영)을 몰아 귀양 보내고 우왕(禑?)을 강화도로 방출하여 신구 세력이 일변하여 친명으로 기울고 토지개혁등으로 이성계의 세력은 날로 더하여 왕의 거취도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周)는 처음 친명으로 나아갔으나 야심이 노골한 이성계와 뜻이 맞지 않아 왕씨조를 위한 충성에는 선생과 뜻을 같이 하였다. 송경지 팔은집(松京誌 八隱集)이 있는데 그 가운데 송은맹오편(松隱盲 篇)안에 이런 말이 있다.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 도은(陶隱)이 소매를 붙잡고 통곡하여 가로되 때가 이같이 되었으니 하늘이 시킨 일이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나무랄 수 없다. 포은이 죽음을 맹세하는 날에 공(公:松隱을 가리킴)을 불러 울며 말하기를 "사는 것은 임시오 죽는 것이 영원한 것이니 비록 천명이라 할지라도 내가 홀로 죽어서 우리 왕이 계시는 뜰에 돌아갈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 이는 천익(?翊) 즉 선생과 재(再:야은) 와 색(穡 즉 목은)이다" 드디어 이성계가 등극하여 조선을 개국하려 하자 선생은 여말 72현과 더불어 개경(開京)을 떠나 환고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개국한지 4년째된 1395년(태조 4년)에 선생을 불러 등용할려고 처음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연이어 내려 보내다가 1396년에는 좌의정(左議政)으로 하여금 불렀는데도 듣지 않았다. 당시 사자로 내려 온 예관(禮官) 권근(權近 호:陽村)이선생을 찾아 갔다가 헛되이 돌아와 왕에게 보고하기를 "그윽히 본적 박천익(朴?翊:선생을 가르킴) 은 왕의 폐백의 중요함을 돌보지 않고 마치 죽음을 삶같이 여기오니 신은 혼자서 불러올 수가 없겠습니다" 그 때 선생은 왕의 폐백을 보아도 봉사와 같이 하고 예관 권양촌(禮官 權陽村)의 말을 들어도 귀머거리같이 행사한 것이기에 그 이름을 송은맹오편(松隱盲)이라고 한 것이다. 선생의 사자란 융(融:憂堂) 소(昭:忍堂) 조(調:啞堂) 총(聰: 拙堂)등의 사당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후에 현달하였다. 충숙(忠肅)이라고 시호하였으며 밀양 소고야에 장하였고 밀양 덕남(德南) 청도 용강(龍岡)‚ 단성 신계(新溪)에 향사하였다. 1835년(헌종 1년)에 청도 북지(北旨)에서 선생의 영정(影幀)이 나와 이를 청도 이서 용강에서 선생의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이를 봉안하고 춘추봉향을 하고 있다. 또 선생의 문집을 원래 자인의 어느 과부집에서 약간의 시문과 만제문(만祭文) 등이 나와 이를 1832년(순조 32년)에 발간하였으며 여기에 삼은(三隱)등 과 창수(唱酬)한 시가 많이 나왔다. 그중 한 수를 소개하면 "지난날 일들을 헤아려보니 영화란 이름이 옥이로구려 가슴속 품은 생각 말 할것없이 산으로 돌아감만 같지 못하네" 하니 포은이 답하여 읊되 "우리들은 그 무슨 인연으론지 공명으로 반생을 지났구려 이제는 푸른 송죽을 벗삼아 청산에서 흰 머리로 늙어 가세나" 하였다. 1398년(태조 7년) 11월 27일에 졸 하였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도주지‚ 도주문화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