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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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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성제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성제원 호 : 자경/동주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제원(?元)이요. 자는 자경(子敬)이고 호는 동주(東?) 또는 소선(笑仙)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시조(?祖)인 성인보(成仁輔)선생의 11세손이고 파조(?祖)인 대제학 성석용(?提學 成石瑢)선생의 6세손이며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성개(成槪)선생의 현손이요 승문원 교리(承文院 敎理) 성희(成熺)선생의 증손이며 정재(靜齋) 상담년(成聃年)선생의 손자이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성몽선(成?宣)선생의 아들로 1506년(연산군 12년)에 태어 났다. 선생은 공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천자가 뛰어나고 학문을 즐겨 면학하였는데 서봉(西峰) 유우(柳藕)선생의 문인으로 수학하여 성리학(?理學)을 비롯하여 산경(山徑) 지지(地誌)‚ 의학(醫學)‚ 복술(卜術)에 이르게 까지 정통하였다. 선생은 청년기부터 명지 순방과 시와 벗들과 교유(交遊)하고 세사에 구속됨이 없이 초야에 살며 세속에 초연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보은현감(報?縣監)에 출사 하였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 올 때 보은(報?) 고을 백성들이 반상 노소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을 가로막고 이별을 아끼었다 한다. 선생은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공주의 향리에 돌아와 시유에 잠겨 세속을 멀리하다 1559년(명종 14년)에 향년 54세로 졸 하였다. 뒤에 제학(提學)이 추증 되고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하고 시호는 청헌(?憲)이다. 저서에는 동주 유고(東? 遺稿)가 있다. 선생의 증조부인 인재 성희(仁齋 成熺)선생은 자가 용회(用晦)이고 호는 인재(仁齋)로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성개(成槪)선생의 아들이며 문신으로 이조 단종 때의 충신이다. 선생은 학식이 고명(高明)하고 소행이 출중하여 천거를 받아 한성 참군(漢城 參軍)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承文院 校理)에 오르고 부윤(府尹)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년)에 매죽헌 성삼문(梅竹軒 成三問)선생의 친척이라 하여 10여 차례의 극심한 국문을 받았으나 끝내 함구하여 김해에 유배 안치 되었다가 3년만에 풀려 나와 공주의 달전리(達田里)에서 충의심에 불타다 1456년(세조 6년)에 졸 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하고 저서에는 인재집(仁齋集)이 있다. 선생의 조부인 정재 성담년(靜齋 成聃年)선생의 자가 인수(仁 ) 또는 인수(仁壽)라 하며 호는 정재(靜齋)이고 인재 성담수(仁齋 成聃壽)선생의 아우이다. 1470년(성종 1년)에 별시 문과에서 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여러 자리를 역임하였다. 선생은 1477년(성종 8년)에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에 오르고 이어 수찬(修撰)‚ 정언(正言)을 거쳐 1479년(성종 10년)에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고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또한 선생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시유를 즐겼다. 저서에는 정재집(靜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한국인의 족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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