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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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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송영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송영호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1902년에 출생하였다. 일정 때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락하며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활약함으로서 소위 유림 제2차사건에 연루되어 1927년부터 3년간의 옥고(?苦)를 치렀다. 즉 1924년 북경에 유학중 1925년에 김창숙(金昌淡)을 만나서 독립운동자금 20만원 모금을 모의하고 상해의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과 의논하여 폭탄3발을 구입하여 백주(白晝)에 서울에서 일발을 던져 세인을 놀라게 함으로서 독립투사들이 다수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세칭(世稱)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당초에는 북경에서 김창숙을 만나 만주와 몽고 사이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동포를 이주케 하여 기반을 조성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 개척자금을 모금하려고 대구 등지를 분주하게 내왕하였으며 1926년 2월에는 동생 재호(在祜)와 더불어 서울에 갔다가 귀가 도중 상주에서 그 동생 재호가 왜헌(倭憲)에게 영호로 오인되어 인치고문(引致拷問)을 당하여 자살까지 기도하였으나 성취는 못하였다. 이렇게 전후(前後)에 걸쳐 김창숙에게 모금하여 보낸 자금이 1‚400원에 이르렀는데 1927년에 조선총독부제령(朝鮮總督府制令) 7호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니 그 때 체포된 독립투사 19명중 본군 출신은 박재형(朴齊衡)과 송영호 두 분이었고 제1차 유림사건으로 체포된 영주 인사는 김동진(金東鎭)‚ 권상두(權相斗)‚ 정태진(丁泰鎭)‚ 김택진(金澤鎭) 등이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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