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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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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신적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신적도 호 : 호계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74년(선조 7년) 상세설명 정묘‚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속에서도 가장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기록을 남기는 전쟁이다. 그 때에 서울에서도 먼 영남땅 우리 의성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분연히 두 차례나 출전하였던 이가 바로 신적도다. 그의 호는 호계‚ 관향은 아주고 이름난 효자 원록의 맏손자이다. 충신은 효자의 집에서 구하는데 된다는 말이 그에게도 적중되었다 할것이다. 1574년(선조 7년) 5갑술 12월 29일에 의성읍 도암리(현재의 도동동)에서 태어나니 가문에서나 나라에서나 그의 존재는 오늘껏 찬연히 빛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품성이 수미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서애 유성룡과 우복 정경세도 일찌기 그의 재질을 크게 찬탄한 바가 있었다. 33세에 동생 열도와 더불어 함께 진사하니 모두가 영광이라 하였다. 갑인년에 양친을 잃고 애훼가 지나치도록 치상하였고 시묘 3년을 하였다. 빙계산장이 되어서는 정조의 적을 삭하여 기강을 세우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임금이 강화도로 들어감에 의병과 군량을 모아 밤길도 재촉하였으나 중도에서 화의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고 상운도 찰방을 특제하였고 역민믈도 선치에 감복하여 떠난 뒤 거사비를 세웠다. 재능 참봉‚ 건원참봉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 있을 때였다. 병자년에 또다시 청나라 태종이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물밀듯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 왔다.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 몽진하고 비빈들은 강화로 피난했다는 엄청난 소식을 전해 듣고 그는 또 다시 의병을 이끌고 떠났다. 정묘년처럼 이번에도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서 화친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먼저 떠난 그의 부하들의 장렬한 죽음과 단군시조 개국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나와 무릎 꿇고 항복하는 비극을 듣게 되었다. 행재소로 달려가서 울면서 화친을 주장한 조신들을 크게 통박하였다. 국왕도 그의 충성을 듣고 다시 부르려 했으니 호족의 속방이 된 세상을 탄식하고 다시 나아갈 뜻이 없어 깊이 숨어 버렸다. 미곡(지금의 옥산면)의 산중에서 초라한 집을 지어 그 이름하여 채미정이라 하였다. 백이 숙제의 충의를 이어 받겠다는 뜻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겠다. 세상 사람을은 그를 평하여 "의성땅 산중에서 크게 밝음이 해와 달과 같다."하였다. 오랑캐의 속방이 된 이 세상을 하늘에 해를 잃었는데 비유했기 때문이다. 1664년(현종 4년) 계묘 12월 20일 타게 하니 향년이 90이다. 그의 동생 만오 달도와 난재 열도와 더불어 삼형제가 기라성 같은 일세를 살고 갔다. 통정대부 아조참의로 추증되고 단구서원에 제향하였다. 유집 3권에는 당세 명석들이 최고의 찬탄과 경앙의 뜻이 담긴 글을 보냈음이 나타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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