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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아장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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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아장섭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아장섭 호 : 이일/죽파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54년(철종 5년) 상세설명 1854년(철종 5년) 갑인 6월 4일에 금성면 산운동에서 태어난 이장섭은 자가 이일‚ 호는 죽파‚ 관향은 영천이다. 선정을 베푼 관찰사 광준과 충신 민환은 그의 이름 높은 조상이다. 그는 일찌기 백부인 통덕랑 연재에게 입후하니 누대의 봉사손으로 이어지게 됨에 온 대소가에서 총애를 입게 되었다. 유시로 총명과 재질이 과인하고 의표가 준정하여 장래가 촉망됨을 보는 이 모두가 짐작하였다. 1888년(고종 25년)무자에 그의 나이 35세가 되고 깊은 경지에 다달은 학문은 청운의 돈 뜻이 펴이니 문과 급제의 영광을 얻었다. 생양정의 가사는 어른에게 맡기고 출사의 뜻을 승락받아 서울로 떠났다. 내직의 요직을 거치고 마침내는 선비로서 최고의 보람을 느끼는 홍문과 교리의 직에 이르렀다. 통훈대부의 위계에서 지제교겸 경연시독관으로 임금 앞에서 그의 대임을 완숙하게 수행하였다. 성균관전적‚ 사간원 정언‚ 춘추관 기주관‚ 동학교수 등 요직에서도 그의 능력은 대단한 평가를 받았으나 계속 출사의 뜻은 날이 갈수록 식어져만 갔다. 국운은 기울고 조정은 어지럽고 총고한 선비로서 그의 뜻을 펴 나가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경주부윤의 막중한 요직을 사양하고 선훈을 명념하며 고향의 전원생활이 그리워서 돌아와 버렸다. 1894년 갑오에 동학란이 삼남으로 퍼지고 그 세력은 마침내 도성을 넘보게 되니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고 잇달아 청일 전쟁이 이 땅에서 불 붙는 무서운 시국이 되었다. 고향의 전원생활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향당과 교루하던 그의 뜻도 지켜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폭도로 변한 동학군의 잔당이 부락을 습격하여 물심 양면으로 그 피해는 말이 아니고 모두가 전전 긍긍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넓은 저택을 서당으로 제공하고 후진을 가르치는데 최대의 역점을 기울였다. 학문을 가르치고 토속을 순화하며 종당을 구휼하면서 이 고장을 지켜 나가려는 집념은 대단하였기에 경주부윤으로 다시 부르는 조정의 명도 사절하였다. 금성산 깊이 수정동으로 옮겨가서 난국이 진정되기를 기다렸으나 세월은 길기만 하였다. 1907년(순종 1년) 정미 11월 12일 향년 54세로 경주 객관에서 마지막을 고하니 세상에 못다 편 뜻 한 깊게 떠났다. 그의 죽음이 고향으로 전해오자 원근의 사림은 크게 슬퍼하고 못다 편 높은 뜻에 최대의 아쉬움을 만곡하였다. 춘산면 금천동 늑두산에 영침하니 예조판서 김종한이 비문 지어 명필 윤용구가 베껴 썼다. 아들 숙은 항일 지사로 풍찬노숙 해외에서 오랜 객고를 겪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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