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오석준

추천0 조회수 105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오석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오석준 호 : 응홍/물와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함양(咸陽)오씨‚ 자는 응홍(應?)이요 호는 물와(勿窩)이다. 문월당 오 극성(問月堂 吳 克成)선생의 후손으로서 1876년(高宗 丙子) 청기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4서 3경을 배워 유학(儒學)에 통달하였다. 평소에 우국충정(憂國衷?)이 지극하였는데‚ 예안(禮安)의 향산 이 만도(響山 李 晩燾)선생이 단식(斷食)으로 굶어 순국(殉國)하고‚ 벽산 김 도현(碧山 金 道鉉)선생이 동해를 밟아 순국하였음에 충격을 받아‚ 나라 위한 충성을 바칠 길을 찾던 차에‚ 마침 기미년(己未年) 봄에 반도강산에 독립 만세사건이 일어날 때에‚ 영양의 주모자(主謀者)로서 의분에 넘친 주도 역할을 하였었다. 사단법인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의 이 용락(李 龍?)이 지은 삼일운동실록(三一運動實錄)에 다음과 같이 기재(記載)되어 있다. 경술국치(庚戌國?) 후에 의분을 참지 못한 여러 애국자들이 자결순국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에 오 석준(吳 錫?)의 삼종숙‚ 오 재결(吳 在杰)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오 석준은 그 가문에 가장 숭배하던 종숙을 작별한 후에 선영 계하(先塋 階下)고장에서 주경야독(晝耕?讀)으로 한문을 전공(專攻)하다가‚ 1918년(戊午) 음력 12월 21일 고종 황제 승하(昇遐)하신 비보(?報)를 듣고 더욱 통분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동방나라(?韓帝國) 이미 땅에 묻혔음을 통곡하는데‚ 하늘 무너짐(皇帝의 崩御)은 깊은 한겨울‚ 초당에 묻혔으되 모름지기 군신(君臣)지간의 의리를 아노니 명명백백한 백일이 밝고 밝게 머리 위에 임하도다.>(痛哭東州己陸 ?崩又是?冬? 草茅須識君臣義 白日昭昭頭上臨). 이 시는 나라님과 신하의 의리(君臣有義)를 되새겨 잃은 나라를 찾으려면 독립운동을 해야함은 하늘의 햇빛처럼 소명(昭明)한 사리(事理)라는 정정당당한 결의를 읊은 싯귀다. 기미년 음력 2월 24일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할 계획으로 동민(?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읍내에 도착하였다. 이 때를 좋은 기회 삼아 약속하지 않았던 장꾼 수천 명이 모였다. 이에 솔선(?先) 흥분하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旗)를 장터 한 복판에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니‚ 수많은 군중(群衆)이 한꺼번에 호응(呼應)하였다. 그리하여 시위행진(示威行進)이 맹렬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다가 왜경(倭警)의 비상 경계가 삼엄(森嚴)하므로 우리는 적수 공권(赤手 空拳)이라 어쩔 수 없이 체포되었다. 구속된 그는 울분은 참지 못하여 유치장에서도 사나 죽으나 내내 만세를 부르다가 혹독한 고문(拷問)을 당했으나 시종(?終) 굽힘이 없었다. 기소(起訴)되어 대구 감옥에서 3개월 이상 구감 되었다가 상고(上告)하여 경성(京城)감옥으로 이감(移監)되어 상고 기각으로‚ 복역 1년 6개월 후에 출옥하였다. 그 외의 수십명 농민은 영양읍 서부동 연초조합 창고에 구류 당해 갖은 고문으로 취조 당하기 수십일 만에 오 석준의 선동에 의함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모두들 석방되었다. 선생은 옥고(?苦)의 여독(餘毒)으로 오랫동안 요양(療養)하면서도 일제말기(日帝末期)의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로 왜경의 감시(監視)와 수차의 예비 검속을 당하는 박해(迫害)를 받았다. 항일투쟁뿐 아니라 청기동에 청계서당(?溪書堂)을 설립하여 후진교학(後進敎學)에 힘썼으며‚ 영양군 향교(鄕校)의 전교(典敎)를 역임하였다. 끝내 하늘에 사무치던 비원(?願)인 을유(乙酉)년 조국광복을 맞이한‚ 백발이 성성한 독립투사의 감개무량(感慨無量)함...... 곧 영양군 치안 유지회(英陽郡 治安 維持會)고문(顧問)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숙원(宿願)인 남북통일을 보지 못하고 병석에서 아들(孝承)에게 기미년의 기록인 음설록(飮雪錄)의 유고(遺稿)를 전하면서 <이후에 혹시나 3.1동지 중에 찾는 분이 있거든 보여라> 유언(遺言)하고 1951년 영면(永眠)하니 향년 76세이다. 1980년에 독립 유공 표창장(獸立 有功 表彰狀)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