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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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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오시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오시준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27년(중종 22년) 상세설명 관향은 낙안(樂安)이요‚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장군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선생의 아들로서‚ 1527년(中宗 22年 丁亥) 영해에서 태어났다. 1562년(明宗 17年 壬辰)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하였다. 체력(體力)과 용맹이 출중하여 육도삼략(六蹈三略)에 통달하였으므로‚ 무예로써 명성을 국내에 크게 떨치었다. 1579년(宣祖 12年 己卯) 창주진관구 병마첨절제사(昌州鎭管區 兵馬僉節制使)를 제수하였다. 선조(宣祖)께서는 장군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시어‚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下賜)하시었다. 1584년(宣祖 17年 甲申) 칠원 현감(漆原 縣監)으로 부임(赴任)하였을 때에‚ 그 지방민이 본디 기질이 사납고 읍정(邑政)에 폐단이 많았던 것을 힘을 기울여 새롭게 개선(改善)하여 덕치 선정(德治善政)하니‚ 임기(任期)를 마치고 떠날 때에 현민(縣民)들이 오 시준 현감 애민 선정 송덕비(吳 時俊 縣監愛民善政頌德碑)를 세웠다. 조정(朝廷)에서는 장군의 장재(將材)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웠다. 장군은 다시 벼슬에 연연(戀戀)하지 아니하고 송강 정철(松江 鄭澈) 선생과 교류(交?)하였는데‚ 송강은 장군 같은 인재가 벼슬에서 물러나 당세(當世)에 크게 등용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장군이 귀향(歸鄕)하여 대청부곡(?靑部曲 琅在의 靑杞面)에서 청계공 진사 김 진(靑溪公進士 金 璡)과 사귀기를 난초의 기품 있는 봄철과 국화의 향기 높은 가을에 물 맑고 자갈돌이 흰 수석(水石)간에 의좋은 벗으로 상종했었다. 항상 향속(鄕俗)이 문화 되지 못함을 통탄하더니‚ 김 진 벗과 더불어 의연금을 모아 영산 서당(英山書堂)을 세워 우리 고장의 선비를 교양 하니‚ 거문고 타며 글 외우는 소리 낭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예절을 지키는 윤리 도덕과 문풍(文風)을 떨치었다. 임진왜란이 돌발(突發)하였을 때는 이미 연로(年老)한 후(後)인지라‚ 칼을 짚고 진두 지휘할 수 없어 둘째 아들 수눌(受訥)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초유사(招諭使)의 막하(幕下)에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 가문은 원래 세세 무신(世世武臣)으로 나라님의 두터운 은덕을 입었으며‚ 나도 무과 급제하여 특히 손오병서를 하사(下賜) 받자왔으니‚ 그 은혜를 갚아야할 오늘날을 당하여‚ 네가 내 뜻을 대행(代行)하되 반드시 몸바쳐 나라 위해 충성을 다하라>명령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 초유사의 막하로 달려가서 왜적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장군은 1613년(光涇 5年) 감천동(甘川?)에서 별세하니 향년 87세이다. 현감공으로 알려졌거니와‚ 무예와 지방 행정과 향토 문화에 커다란 공덕을 끼친 어른이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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