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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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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원응국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원응국사 호 : 봉거((逢渠) 활동시기 : 고려시대 시대 : 고려시대 상세설명 원응국사(圓應國師)는 운문사의 중흥지조(中興之祖)이다. 1502년(문종 6년)에서 1144년(인종 22년)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이씨이고 휘는 학일(學一)이며 자는 봉거(逢渠)이고 응첨(應瞻)의 아들로서 정읍군(井邑郡:保安)출신으로 11세 때 진장법사(眞藏法師)에게서 중이 되었다. 13세 때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향수혜암선사에게서 공부하여 선지삼장(善旨三藏)을 깨달았고 경(經)‚ 율(律)‚ 논(論)을 널리 연구하였다. 특히 대반야경(?般若經)에 능통하였다. 1085년(선종 2년)승과에 급제하고 당시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천이 천태종(?台宗)을 세워 많은 교도들이 여기에 쏠렸으나 홀로 조종(祖宗)을 지키며 천태종에 들어오라는 의천(義?)의 권유를 거절했다. 1099년(숙종 4년)에 홍원사(弘圓寺)에서 대각국사(?覺國師)가 원각회(圓覺會)를 베풀어 원응국사를 부강사로 삼았으나 선과 교(敎)를 섞을 수 없다 하여 사퇴하였다. 이 때 이 법회에 참석한 9세 된 왕자(?子:圓明國師)가 급사하게 되자 국사가 대반야경(?般若經)을 염불하여 소생케 했으며 왕명으로 법주사(法住寺)주지가 되었다. 1106년(예종 1년)에 삼중대사(三重?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 주지로 있다가 귀산사 주지가 되었다. 1108년(예종 3년) 선사가 되고 1113년(예종 8년)에 내제석원(內帝釋院)의 주지‚ 이듬해 대선사가 되어 1117년(예종 12년)에 안화사(安和寺)의 주지가 되었고 1122년(예종 17년)에 왕사에 임명되었으나 책례를 올리기 전에 예종이 죽자 인종(仁宗)즉위 후 선왕의 뜻대로 인종의 왕사가 되었다. 1129년(인종 7년)에 운문사의 주지가 되어 중앙에서 은퇴하였는데 국사는 허물어진 운문사를 제3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국사가 운문사에 있다는 것을 안 많은 학자들이 찾아 들었다. 국사의 운문사 중창은 1131년(인종 9년)에 이루어졌다. 또한 왕은 왕사로 있을 때의 공답(供沓)인 신수(新藪)‚ 신원(新院)등 두 곳의 전지 2백결과 국노비 5백인을 운문사에 내리어 만세향화토록 하였고 길이 5척‚ 넓이 3척의 비를 절의 서북간에 세우고 삼보원(三寶院) 35간을 절의 북쪽 3리지점에 설치 했으며 염성고(鹽城庫) 13간은 절의 북쪽 3리 서북간 3리밖에 세웠다. 대천원(?川院) 2백결은 삼보원(三寶院)에 속하게 하여 염성고(鹽城庫)와 같이 향와 때의 여러 가지 물건을 갖추게 했으며 신수 신원 3백결은 향화 때 정재미로 부축케 하고 노비 5백인은 공포(貢布)를 걷우어 들여 국사의 향화를 받드는 여러 무리들의 의재(衣財)로 삼게 하였다. 그 외의 필요한 집물(什物)들은 국사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 보물로 지정되어 운문사에서 보존하고 있는 원응국사비는 그때의 비석이다. (참고문헌: 인명대사전‚ 불교사전‚ 도주지‚ 도주문화)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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