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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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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맹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맹전 호 : 백순/경은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백순‚ 호는 경은‚ 본관은 벽진으로 대제학 견간의 현손인 병조판서 심지의 아들로 태종 때에 성주군 초전면 홈실에서 태어나서 선산에서 자라‚ 성종 때 90세를 일기로 돌아갔다. 이조판서에 추증‚ 선산의 월암서원‚ 함안의 서산서원에 제향‚ 시호는 정목‚ 정조 때 정간으로 개시되었다. 1427년(세종 9년)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정언을 거쳐 외임을 자청‚ 거창현감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있을 때‚ 수양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현감직을 내어놓고 선산 강정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혹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자기 눈이 멀었다고 하며 사람을 쳐다 보지도 않았다. '나라가 망한 것을 멀쩡히 눈을 뜬 채 본 사람인데 눈을 떠서 뭘하겠는가……'하는 생각으로 청맹광이 행세를 하였던 것이다. 강호 산인 김숙자가 선생의 집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학문을 즐기는 그였기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는 인연을 끊었으나 김숙자만은 자주 만나 서로 뜻이 통했으므로 곧 백년지기처럼 가까이 지냈다. 선생이 거창현감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후에도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궐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 세상에 뜻이 없으니 생계의 걱정을 할 리가 없었다. 집안 살림이 너무 가난했지만 선생은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방바닥에는 까는 자리조차 없고 밥 먹을 때는 수저조차 없었으나 조금도 그런 것에는 개의하지 않았다. 그 중에도 자녀는 많아 슬하에 아홉 명이나 두고 있었다. 때때로 선생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아비를 잘못 만나 세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면목이 없구나.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한 번 세상에 나가 출사하여라. 나는 이 세상에 나가지 않겠지만 후일이면 반드시 너희들에게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하고 위로의 말씀을 해주곤 하였다. 선생의 아들들도 부모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아버님을 너무 염려하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 뜻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소자들도 좋은 시대가 오면 세상에 나갈 것입니다."하고 서로 위로하였다. 누가 보든지 선생의 생활은 너무 초라하였지만 일체 세상 사람들과는 인연을 끊은 채 호연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말년에는 김숙자와도 만나지 않고 오직 김숙자의 아들인 김종직 한 사람만 만나고 지냈다. 선산의 금오산 아래에 묻혀 세상을 등지고 사는 선생은 이와 같이 젊은 유생을 격려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도록 타이르고 이끌어 마침내 점필재 김종직이 출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 해동명신록‚ 한국인명대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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