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상길

추천0 조회수 81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상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상길 호 : 사우/동천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벽진 이씨로 1556(명종 11)년에 태어났다. 자는 사우‚ 호는 동천으로 1597(선조 12)년 진사에 합격 후 1585(선조 18)년 문과에 등제 내직으로 여러 관직에 오라 호조좌랑으로 있다가 고산도 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임진란에는 예조정랑으로 임금앞에 나아가‚ "북관으로 옮기어 뒷날을 도모하는 일은 근원적 대책이 아니옵니다."라고 임금이 도성을 함부로 비우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뒤에 광주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다스린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1602(선조 35)년에는 정인홍을 추론하다가 풍천에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 6년 동안에 선생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조용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뒤 회양부사를 비롯 여러 직을 거쳐 1617(광해 9)년 하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부하를 잘 단속하여 재물을 탐내지 못하게 함으로 조선의 위신을 크게 세웠다 한다. 1618년에는 광해군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남원에 내려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623(인조 1)년 인조가 반정하자 불리어 승지·병조참의 등에 이르고‚ 1627(인조 5)년 정묘호란에. "오늘날 임금께 욕스러움이 이에 미치었는데‚ 삶이 죽음만 못하다."라고 임금을 뵙고 나온 후 통곡을 했다 한다. 1635년 선생의 나이 80세‚ 공조판서가 되고 기사에 들었다가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임대신으로 묘사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가 선원촌에 있었는데 1637년 1월‚ 청병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소식을 듣고 1월 22일‚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종사는 끊어뜨릴 수 없다. 나는 나라의 정경이니 나라가 파하면 마땅히 사직에 죽어야 한다."하고 말을 재촉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통곡 재배하고 나와서 물밀 듯 닥치는 적을 맞아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며 자폭했다. 선생에게 나라에서 좌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숙이라 내렸으며 김상용 등과 함께 강화의 충열사에 제향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양주군 하계리에 있고 우암 송시열 찬의 신도비가 섰으며 1786(정조 10)년 조정에서 부조지전을 내렸다. 선생의 아우 상급은 자를 사언‚ 호를 습재 졸부라 했는데‚ 1572(선조 5)년에 태어나 1603(선조 36)년 진사시에 합격‚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로서 인조의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종시 김상헌 등과 척화를 주장하더니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며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에서 형이 순절한 사실을 알고 그 시체라도 모시려고 가던 중 적을 만났다. 공은 처음부터 끝가지 적의 무도함을 꾸짖고 저들에게 항복하지 않자 적은 또 공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 날이 1637(인조 15)년 2월 3일이었다. 선생은 소박하고 뜻이 귿어 자기를 위한 일에는 추호도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광해조 때는 뜻을 깨끗이 하려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와 있었는데 인조반정 후 다시 복관되어 절의를 지켜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나라에서 자헌대부의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묘소는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에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