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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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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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 저작(권)자
-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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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장르)
- 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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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정보
- 이상화 활동시기 : 조선시대 시대 : 1901∼1943 상세설명 효와 충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란 말이 있다. 집안에선 효도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충성을 다하는 일은 백성된 도리다. 그러나‚ 대를 이어 충과 효를 이룩한 집안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성산인 이상화는 경무공 제의 후예로 기례 사람이다. 1728(영조 4)년 무신난에 형 세한과 함께 창의하여 진주 군문에 나아가 적을 토벌할 계책을 말하니 영장이 그 계교대로 고갯길에 병사를 매복하여 성초령에서 적을 사로잡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이효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효성도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고서는 슬픔을 못 이겨 3년을 시묘하며 죽만 먹은‚ 지극한 효자이기도 하여 1788(정조 12)년 나라에서 특명으로 복호를 내렸다. 아들 숙봉 역시 아버지에 못지 않는 효성이 있었다. 그 어머니가 위급할 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림으로 회생한 적도 있고‚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침 저녁 성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가는 길에 무서운 짐승이 득실거렸으나 감히 한 번도 이효자를 해치려 하지 않아 짐승도 효성에 감동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효자 숙봉의 아들에 용재가 있었는데 이 또한 할아버지‚ 아버지를 본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13살 때에 어머니 김씨가 종기가 나서 여름이라 곪아 벌레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효자 용재는 아우 용손과 같이 어머니의 종기를 번갈아 7일이나 농을 빨아내어 낫게 했는데 2년 뒤에 다시 어머니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려 어머니가 수년을 연명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가 시묘하는데 큰 호랑이가 늘 묘 옆에 와 두 형제를 돌보아 주기도 했으며 소상일 저녁에는 매가 꿩을 잡아 묘 앞에 던져 줌으로 그 고기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대를 이은 충효는 하늘에 통하고 짐승에게까지 통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효자가 시묘하던 곳을 시묘동 효자산이라 일컬으며 정조조에 다시 복호를 내려 삼세충효를 세상에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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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물 속성
- 1 차 저작물
- 공동저작자
-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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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장르)
- 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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