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숭인(李崇仁)

추천0 조회수 194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숭인(李崇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숭인(李崇仁) 호 : 도은(陶隱) 활동시기 : 고려시대 본 관 : 성주 출생시기 : 1349년 출 생 지 : 1349년 시대 : 고려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성주 이씨로 장경의 후손이며‚ 성산군 원구의 아들로 자는 자안‚ 호는 도은이며‚ 1349년(고려 충정왕 원년)‚ 용산리(지금의 성주읍 경산동)에서 태어나‚ 1392년(태조 원년)에 돌아갔다. 공민왕 때 16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21세에 태학 교수로 임명되어 문학을 진흥했으며‚ 명나라 태조가 건국하여 국서를 보내왔을 때‚ 왕명으로 그 답서를 지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아직 나이 어리다 하여 보내지 않았다. 진덕박사‚ 예의산랑‚ 예문응교‚ 문하사인 등 벼슬을 거쳐 정몽주‚ 김구용‚ 박의중 등과 함께 성균관학관을 겸하고 세자사부로 직접 강론에 참가했다. 공민왕이 암살되고(1374년)‚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전리총랑으로서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선생은 김구용‚ 정도전 등과 함께 복원의 사신을 돌려 도낼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득세로 한때 성주로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이 풀려서 고향 성주에서 청휘당을 세우고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1377년(우왕 3년)‚ 다시 불리워서 성균사성‚ 사의대부를 거쳐 예문관제학으로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였다. 1383년(우왕 7년)‚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과 명나라 사신을 죽인 일로 고려 조정을 크게 탈을 잡으므로 왕명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답서를 지어 바쳤는데 그 글이 너무 명문장이라 명나라 태조가 감탄하여 공민왕에게 시호를 내리고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며‚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도 많이 줄이는 등 선생의 문장덕으로 어려운 국제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명나라 황제가 선생을 한번 보기를 원하므로 1386년(우왕 12년)‚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니 명나라 황제가 선생을 심히 사랑하여 관복을 주어 명나라 고관들과 한 자리에 서게 하는 두터운 대우를 받고‚ 또‚ 명나라의 명사들을 모아 선생과 함께 시험을 하였으나 선생의 재질이 단연 뛰어나서 황제는 관 위에다 백옥을 얹어 문창성임을 표시하고 관복 1벌‚ 벼루 1개‚ 금지팡이 1개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선생은 정몽주와 의논하여 이 영광을 고려의 조정에 고루 나누어 가지려고 황제께 이 관복을 고려에서도 착용하도록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금지팡이는 난리통에 잃어버렸으며 벼루는 지금도 후손인 성주 이씨 종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1388년‚ 정도전 등이 우왕을 강화로 내쫓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매‚ 선생은 창왕을 세웠다. 1389년(창왕 1년 공양왕 1년) 이색‚ 김사안과 재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예문관 제학이 되어 박천상‚ 하륜 등과 함께 영흥군환의 유배 및 일본표류 사건(1371∼1389년간 일본 표류)의 진실 여부를 조사하다가 무고를 입어 극형을 받게 되자‚ 시중 이성계‚ 이림 등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서연관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경산부(성주)로 유배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윤이‚ 이초의 무리가 명나라에 도망가서 무고를 했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가있던 사신 조반의 귀국 보고에서 드러나 선생과 이색‚ 권근 등 중신들이 옥에 갇히는 이·초의 옥사가 벌어져 청주옥에 갇혔다가 풀려 나오고‚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가 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해주에서 요양하는 것을 정몽주와 같이 의논하여 이성계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선생은 붙잡혔으나 풀려 나와서 고향에 돌아와 남화관 별장을 지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선생은 그의 일당으로 몰래 유배지인 성주에서 조선 개국후 살해 되었다. 선생은 1392년(태조 원년)‚ 향년 44세를 일기로 고려의 국운과 함께 순국 하였던것이다. 그 후 1401년(태종 1년)‚ 벼슬을 다시 내리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이라 했다. 1656년(효종 7년)‚ 충현사에 배향하고 개성의 두문동서원에 72현 중 한 사람으로 올려 있다. 태종이 권근과 변계량에게 명하여 선생의 문집 2권을 발간하였다. 선생은 성리하게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그의 문장은 명 태조를 감복시켰다. 참고자료 : 성산지‚ 성주대관‚ 성주 이씨 가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