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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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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언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언적 호 : 복고(復古)/회재(晦齋)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여주 출생시기 : 1492(성종 22년) 상세설명 외가인 경주 양동의 월성 손씨 종가에서 태어났다.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 (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 ·장령 ·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獸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됐고‚ 유배생활 6년 만에 6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성학군주론(聖學君主論)은 이언적이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그가 중종과 명종에게 각각 올린 십강십목소(十綱十目 )와 진수팔규(進修八規)에 나타나 요점은 정치의 성패와 인생의 향방이란 오직 군주의 일심(一心)과 심술(心術) 여하에 달린 문제로 보고 군주의 수신제가(修身薺家)하는 방법으로서 성학을 당면한 실천과제로 제안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6세기 중엽이후 이황(1501-1570)과 이이(1536-1584)에 이르러 두 경향의 성학군주론이 대두하였다. 주요작품 주요저서 : 《구인록》 《대학장구보유(?學章句補遺)》 등 주요작품 : 일강십목소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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