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여사

추천0 조회수 100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여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여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47년(헌종 13년) 상세설명 관향(貫鄕)은 월성(月城)이니 이 성호(李 聖?)선생의 맏딸로서 1847년(憲宗 13年 丁未)일월면 곡강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으며 부지런하여 부모님을 효성껏 받들어 섬기었다. 16세 되던 해에 수비면 오기동에 거주하는 경주 손씨(孫 秉九)에게 출가하였다. 연소(年少)한 새댁이 시집 온 시초부터 시부모 봉양이 지극하고 남편을 공경함이 또한 정성스러웠다. 산전(山田)갈이 하는 농사일에 길쌈과 방아 품팔이에 손발이 부르트고 몹시 고된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이 늘 화평한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새댁의 부덕(婦德)을 갸륵하다 기리었다. 비록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온 집안이 화평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비운의 서막(序幕)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몰려왔다. 결혼한지 2년 후인 신미년에 불행히도 남편이 타향에 가서 객사하고 말았다. 이 청천 벽력같은 흉보에 열 여덟살 청상과부는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 이튿날 시부와 함께 남편의 시체를 싣고 와서 정중히 장례를 치렀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잇달아 시모가 세상을 떠났다. 비운이 겹친 그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슬픔을 조금이라도 가셔보려고 이사하기를 결정했다. 시모의 장례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와 세살 먹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일월면 가천동(佳川?)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날 외출한 시아버지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몹시 걱정이 되어 어린 아들을 업고 찾아 나갔다. 집에서 5리나 떨어진 길가에 술이 만취된 시아버지가 잠들어 있었다. 깨워 일으키려 애를 썼지만 깨지 않아 업고 있던 아들을 땅에 내려놓고 대신 시아버지를 업었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뜻밖에 화경(火鏡)같은 불빛이 앞길을 비추어 이상히 여겨 곁을 살펴보니 큰 범이 제 눈의 불빛(眼光)으로 길을 비쳐주는 것이 아닌가. 효성이 지극한 부인은 겁나는 마음보다 고맙게 생각하고 그 불빛으로 인도하는 데로 집에 도착하였다. 아무리 힘이 센 편이라 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술 취한 시아버지가 깨지 않아 시체처럼 늘어진 무거운 몸을 업고 먼 거리(距離)를 걸어온지라 몹시 지쳐 힘이 빠졌으나 길가에 내려놓은 아들을 업어와야만 했기에 시아버지를 방에 모셔 눕힌 후에 다시 아들을 업으러 가려고 방문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이 집안 마당에 눕혀 있지 않은가? 비호(飛虎)라더니 길을 비쳐준 호랑이가 어느 결에 어린애를 업어다 놓고 간 것이었다. 예로부터 효행에 흔히 범 이야기가 따르니 그러므로 범을 산중영물(山中靈物)이라 또는 효수(孝?)라 하는가 보다. 그런지 얼마 후에 친정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아린 아들을 업고 곡강동 친정 집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적당한 혼처를 수소문하여 개가시키고자 속여서 불렀던 것이다. 「네가 20전(前) 청춘과부로 가난한 살이에서 창창한 먼 장래를 어떻게 지내려하느냐? 좋은 혼처가 있으니 개가(改嫁)해서 팔자를 고쳐라」하고 누누히 권고했으나 딸이 대답하기를 「남편의 시체를 찾아온 후 곧 자결하여 남편과 한 무덤에 묻히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이 어린 아들의 장래보다도 이 몸 없어지면 아들도 며느리도 없는 시부모님을 위해 죽지 않고 살아가는데 내가 개가해 가면 무의무탁(無依無托)한 시아버지를 누가 봉양하겠어요? 나는 의리도 인정도 없는 인간 같지 않은 짓을 죽어도 못하겠어요」하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런 효부에게 어찌된 벅찬 시련(試鍊)인가 불행이 그치지 않았으니 시아버지가 혹독(酷毒)한 이질(痢疾)에 걸려 오랫동안 아무런 일도 못하게 되어 며느리 혼자서 군색하고 어려운 살림살이하느라고 산에 가서 땔나무를 베어 지고 와서 끼니를 끓여야했다. 지성이면 감천(至誠感?)이라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몹쓸 병이 끝내 완치회건(完治回健) 되었으니‚ 정성과 노력을 다 바쳐 효행 한 보람이 컸었다. 그때에 지방 거주민들이 예조판서(禮曹判書)에게 이 여사의 효행 사연의 글월을 올려서‚ 이 여사 나이 47세 때인 1894년(高宗 31年 甲午) 8월에 별세한 부군(?君) 손 병구에게 부인의 효덕으로 인하여 통정대부(通政??)를 추증(追贈)하였다. 출천(出?)의 효부 겸 열녀인 숙부인 이 여사(淡?人 李 ?史)는 1913년(癸丑) 가천동 본댁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7세이다. 골 깊고 물 맑은 일월면 가천동 입구에 들어서면 소담스럽게 꾸며진 정려비각 앞에 “하늘에 알려진 이 비각에 새겨진 분의 이름을 오래 남겨 후손에게 기리게 하고자 이 글을 오가는 이 앞에 내세운다”하는 안내판이 행인(行人)의 눈길을 끈다. <參考文?> 英陽郡誌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