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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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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인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인임 호 : 승암 활동시기 : 고려시대 상세설명 성주인(星州人) 문숙(文肅)공 이인임(李仁任)선생은 고려문하시중광평부원군(高麗門下侍中廣平府院君)으로서 1312년 황경원년(皇慶元年) 12월에 났다. 벽상삼중 대광검교문하시중도첨의(壁上三重 ?廣檢校門下侍中都僉議)을 지낸 경원공(敬元公) 포(褒)인 아버지와 어머니 경주군부인 설씨(慶州君?人 薛氏) 사이에서 6형제중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호는 승암(勝巖)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의 손자이며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인복의 아우이다. 일찍 문과에 올라 전법총랑(典法摠郞)에 올랐으며 1356년(공민왕 5년)에 강능존무사(江陵存撫使)가 되어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함주(咸州) 북청(北靑) 등 여러 성을 수복하고 1359년(공민왕 8년)에는 서경존무사(西京存無使)가 되어 그해 12월 홍건적(紅巾賊) 모거경(毛居敬)이 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와 의(義) 정(靜) 린(麟) 삼주(三州)를 분탕 서경(西京)을 함락하기에 이를 격퇴하므로서 이등공신이 되었고 이어 경도(京都)를 완전 회복함에 또한 제일공신이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는 서북면(西北面) 순문사(巡問使)겸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그해 12월 충숙왕(忠肅?)의 아우인 덕흥군(德興君)이 원나라를 배경 삼아 고려왕이 되고자 요동에 주둔하면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공으로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은 후 1368년 좌시중이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서북면 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도어서 동영부(東寧府)를 또한 쳐서 옛 강토를 회복 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가을 11월에 원자(元子)를 잘 보호해 달라는 왕의 부탁을 받았으며 그 이듬해 삼월에는 아버지인 가부군시중(家府君侍中)의 초상화를 또한 왕으로부터 받은바 있다. 뿐만 아니라 1374년(공민왕 23년)에는 불행히도 그해 9월 환관(宦官) 최만생(崔萬生)등이 공민왕을 살해하므로 강녕대군(江寧?君) 우(禑)를 즉위 시켰다. 선생은 공민왕을 살해한 일에 격분하여 홍륜(?倫)과 또한 최만생 등을 쳐서 왕의 원수를 갚고는 선왕의 유명(遺命)을 이어 종실대신(宗室?臣) 왕안덕(?安德)과 유(瑜)등으로 더불어 의논하여 우왕을 나이 겨우 10세인데도 선생이 추대하여 즉위하게 된 것이다. 우왕이 즉위한 후 권세를 오로지 하던 선생은 공민왕 시대의 반원 친명책(反元親明策)을 버리고 친원적(親元的)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1381년(우왕 7년) 2월에는 선생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또한 최영(崔榮)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으며 이듬해 2월에는 도읍을 옮기는 의논을 그치고 같은 해 6월에는 최영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또한 선생을 영문하사(領門下事)로 하였다. 1388년(우왕 14년)에 명(明)은 금‚ 은 등의 공물(貢物)을 강요하며 고려를 위협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원(元)의 쌍성총관부 소관이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명(明)에 직속시키려 했다. 이때에 최영은 이미 이성계와 도모하여 정권을 오로지 하던 이인이 선생 일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저들이 장악하였으니 즉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은 처형하고 선생을 경산부(京山府)로 귀양을 보냈으니 지금의 고령군 덕곡면 승암( 巖)마을이다. 억울하게도 귀양온 선생은 약 5개월간 고생하다가 그해 6월 귀양 지에서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귀양 지에서 세상을 떠난 선생은 금고 됨을 풀지 못해 거적장(藁葬)으로 있다가 이듬해 봄 2월에 이르러 왕이 선생의 죄를 사하고 장례를 허락하니 밀직사 강서(密直事?筮)가 왕명을 받아와서 장사하고 은졸문(隱卒文)을 내려 말하기를 공은 [처음과 마지막을 영화로 남겼으니 유감없거니와 좌우의 보필은 그 누구에게 바랄꼬]하였다. 선생이 한마음으로 국왕만을 지켜온 일을 조금도 변치 않았다. 또 순암 안정복 이지은 동사강목을 지으매 신라 백제 고려 이래로 절개를 잃은 사람은 비록 벼슬이 재상이라 할지라도 다 죽은 자와 같다고 쓰고 선생에 이르러서는 큰글로서 강목에 쓰기를 [이인임은 죽었다]하였으니 이것이 다 공정한 필법이라 가이 선생의 만고의 원통함을 풀었다 하겠다. 또한 동현호록에는 원운곡 안순암 이퇴계 윤월정에 이르되 [이인임은 고려 충의라 하였다.] 선생의 묘소와 승암재는 덕곡면 신율리(새밤)에 있다.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들어와 의(義) 정(靜) 린(麟) 삼주(三州)를 분탕 서경(西京)을 함락하기에 이를 격퇴하므로서 이등공신이 되었고 이어 경도(京都)를 완전 회복함에 또한 제일공신이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는 서북면(西北面) 순문사(巡問使)겸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그해 12월 충숙왕(忠肅?)의 아우인 덕흥군(德興君)이 원나라를 배경 삼아 고려왕이 되고자 요동에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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