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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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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진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진영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이 진영‚ 그는 영천군 화북면 오산동 1147번지에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지만 나라 없는 슬픔은 누구보다도 간절하였다. 그 슬픔은 분노로 가득하였고 결국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지하 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살벌한 일경들의 조직과 감시망에는 너무나 무력하역 도저히 향토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복군의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그곳에 가면 분명히 뜻을 성취할 길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 정착하게 된 곳이 통화현(通化縣)이다 .바로 1928년이다. 그는 즉시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여 활약하게 되었다. 주로 정보수집과 일군의 암살‚ 그리고 군사 시설의 파괴 등이었다. 5년 뒤인 1933년 남경(南京)에서 70여리 떨어진 강령진(江寧鎭)으로 이주하여 10월 1일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간부학교 제 2기생으로 입교하여 정규적인 군사학과 전술학 등 지휘관으로서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34년 3월말에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또다시 백범 김 구선생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 하였다. 당시 김구선생은 젊은 이 진영 의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담용이 크고 뛰어난 용맹과 재질은 반드시 후일 큰 일을 도모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모든 교육을 받게 하여 훌륭한 지휘관으로 양성할 계획이었다. 1935년 7월 제3기생으로 졸업하고 즉시 남경(南京)으로 가서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의열단은 다른 독립단체와는 다른 폭력에 의한 독립쟁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생명을 내어놓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돌발된 후에는 성자현(成子縣) 소제지에 있는 중앙군 특별반에 입교 하였고 이듬해 졸업하고는 한구(漢回)로 이주하여 선전공작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때 이미 남경은 일본군이 점령하였으므로 거점을 잃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거점을 한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 곳에서는 적군을 와해시키고 중국인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침력근성을 폭로시켜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그 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설로 중경(重慶)에서 변사 처 주임으로 근무하였으며‚ 1942년에는 광복군총사령부 총무과‚ 참모처 등에 근무하였다. 1944년에는 재중국한인조선민족혁명통일동맹(在中國韓人朝鮮民族革命統一同盟)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사업을 지원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육군사관하교 7기로 졸업하여 1950년 6월 29일 전남화순지구 전투에서 사망한 애국자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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