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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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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탁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탁영 호 : 효사재 활동시기 : 고려시대 출생시기 : 1541년(중종 36년) 상세설명 고려 인종때 공부 상서를 지낸 녹천과 여말 사온서직장 양오의 후예인 이탁영은 1541년(중종 36년) 신축에 의성읍 상리동 606번지 소재 현'충효사'에서 태어났다. 호는 효사재 관향은 경주이다. 그는 17세때 아버지가 타향에서 객사하여 그 관을 모셔 수백리길을 반장(返葬)한 뒤로는 홀어머니를 지성껏 잘 섬겨 왔으며 학업 연마에도 남달리 정진해 왔다. 그 나이 51세때인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에 소서행장‚ 가등청정 등이 거느린 대군이 부산에 상륙 후 3로로 나누어 북상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하여 애국심에 불탄 나머지 그들 왜적을 물리쳐야겠다고 다짐‚ 나라를 위해 눈물을 감춘 채 노모께 하직하고는 일로 용약 진중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경상도 순찰사 김수‚ 초유사 김성일과 같이 체찰사 유성룡 체찰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 조달‚ 전략 수립 등 군무 찬획에 많은 공을 세웠다. 아울러 상부의 동족인 이항복한테 왜적의 동향‚ 전세 등 군사 기밀의 서한을 자주 오가게 하여 적 타도에 큰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8년간이나 현 옥산면 금학동 성골 산중에서 피난하며 돌아 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연민의 정과 노쇠가 겹쳐 앓아 누워 나중에는 앞도 보지 못한다는 눈물겨운 전갈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노모 봉양에 전심 전력을 다했다. 실명한 어머니께 광명을 되찾아 주고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하였으나 그 효력은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항상 물고기 찬을 좋아하므로 앞뜰에 양어장(현 효사당 앞의 효사정)을 조상하여 겨울에도 물고기를 잡아 고아 드렸다. 죽순 또한 즐겨하여 현 충효사 담장 뒤에 대나무를 심어 죽순을 대접하니 그 효성에 하늘이 보살폈음인지 꽁꽁 어는 엄동설한에도 죽순이 돋아났다고 한다. 이같이 효성이 지극해 공이 거처한 당을 '효사당'‚ 그 호도 '효사재'라 이름하여 불려져 왔다. 임진란이 발발하고부터 1599년 난이 평정될 때까지 장장 일곱해 동안의 전란일기를 전진속에서 틈틈이 기록하여 나라에 바치니 임금이 '정만록'이라 이름지어 보내왔다. 그것은 임진왜란의 사료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져 문화재 위원회에서 면밀하게 심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공은 1610년(광해군 2년) 1월 13일에 돌아가니 향년이 70세‚ 현 읍내 중리3동 호현 선영 하에 묻히었다. 그 뒤 숙종때 왕의 사곡 은전이 내려지고 통정대부 첨지중 추부사 란 벼슬이 증직되었다. 이렇게 나라에 충성하고 편모 봉양에도 지극했던 공을 기리기 위한 전사청을 비롯한 충효사 건물은 그 후손들이 1801년(순조 원년) 신유에 세웠다가 대원군때 알시 훼철‚ 1923년 계해에 유림의 발기로 재건되어 춘추 2회 제향‚ 그의 태생 건물이기도 한 효사당은 1957년에 원형대로 개축되었다. 공이 엮은 정만록에는 다음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1) 8년간의 전란일기 2) 국내 장병들의 전적 3) 국내 사정 및 수륙전 승패 현황 4) 명장 이여송의 청병 내용과 군량 및 접대 사실 5) 이여송 격서‚ 청정서 및 국서답‚ 일본국 상세도와 그들이 쳐들어 온 경위 6) 조보와 왕세자의 교유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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