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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장기석(張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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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장기석(張基?)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장기석(張基?) 호 : 진여(震汝)‚ 자하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인동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진여 호는 자하‚ 인동 장씨 안세의 후손‚ 세헌의 아들로 1860년(철종 11년) 11월 22일‚ 벽진면 봉계동 집실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후‚ 정직하고 옳은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의협심이 누구보다도 강하였다. 1898년(고종 광무 2년)‚ 국운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통탄하여‚ 무식으로는 큰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39세에 늦게나마 학문에 뜻을 두고 벽진면 해평동의 고종 수당 여 심연 선생에게 수학하여 43세 때에는 사서 육경을 통달하여 연구심이 깊고 지조가 굳음을 칭찬받았으며 후세 교육을 위하여 전심하였다. 1910년 8월 합방이 되고 11월 3일‚ 일본 임금 명치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경축식에 성주읍까지 나와 참석해 달라고 초청장이 성주 군수와 경찰서장 이름으로 전달되었다.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여기는 선생이 경축식에 나갈리가 만무하였다. 며칠 뒤‚ 이번에는 국경 반대자로 호출장이 보내어 성주경찰서에 출두를 명령하였다. 선생은 심부름 온 경찰관을 호통치며 호출장 뒷면에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 라 써서 되돌려 보냈다. 이를 본 경찰서장은 대노하여 수십 명의 경찰관을 보내어 결박하여 오게 명령하였다. 일경에게 묶이어 가마에 실릴 때 부인 박씨는 선생에게 집안일은 염려마시고 대의를 밝히시라고 격려하였다고 전한다. 1910년 12월 7일‚ 성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날부터 그들이 주는 음식을 전폐하였으며 심문에 답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요. 일본 국왕은 우리의 국적이다. 합방하던 날 죽지 않은 것은 동포가 단합하여 너희놈을 격멸하기 위함이다." 라 하여 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1910년 12월 9일‚ 대구형무소로 이감시켜 갖은 방법으로 꾀고‚ 달래고 협박하였으나 선생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커녕 섬나라 오랑캐의 무도한 침략을 신랄히 비난하니 손톱발톱을 뽑고‚ 불로 온 몸을 지졌으나 끝까지 항거하였다. 1911년 1월 5일‚ 식음을 전폐한 지 27일만에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안은 채 그 추운 겨울‚ 얼음장 같은 옥중에서 눈을 감았으니 향년 52세였다. 이튿날 장례차가 대구 시가에 나올 때는 모든 점포가 문을 닫고‚ 남녀노소가 거리에 나와 통곡하니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1년 3월 8일‚ 경북도내 유림 만여명이 모여 장례식을 거행하매 만장이 천여 수요‚ 제문이 백여 수였다. 그 후 전국 유림에서 의논하여 선생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백이숙제 백세청풍비'를 모방‚ 높이 13자 너비 5자의 '행동청풍비'를 선생이 살던 집실 자양산에 세웠다. 이 비문의 글은 심산 김창숙이 짓고‚ 글씨는 이동흠이 썼다. 참고자료 : 성주대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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