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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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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장보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장보고 활동시기 : 삼국시대 상세설명 신라는 골품제도(骨品制度)에 의한 신분의 구별이 엄격한 사회로 미천한 궁복(장보고)으로서는 큰 꿈을 펼 방법이 없었으나‚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오게 되어 두 사람은 당나라에서 큰 뜻을 펼 것을 굳게 다짐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많은 신라사람이 이주해서 신라방(新羅坊)을 만들고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관청과 신라원(新羅院)이란 사찰(寺刹)도 많이 건립되었다. 장보고는 여가만 있으면 신라방을 방문했고 적산원을 찾아서 신라인을 돕고‚ 고국의 소식에 향수를 달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것은 조국의 정치사정이 날로 악화되어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고 생각을 가다듬던 장보고는 정년에게 자기의 결심을 말하고 함께 귀국할 것을 권했으나 장보고의 귀국을 만류하였다. 장보고의 큰 뜻을 받아들이기에 신라는 너무나 폐쇄적인 나라임을 정년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년과 이별하고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는 42대 홍덕왕 3년(A.D.828)이였다. 그는 곧 왕께 배알할 것을 청했다. 임금 앞에 나아간 그는 자기의 소신을 올리고 해적의 피해를 막고 나라 밖으로 크게 발전하는 길은 수군을 강화하는 길이며 서해의 요지인 청해에 수군근거지를 건설하여 바다를 지배하는 정책을 역설했다. 장보고의 건의는 찬반양론으로 의견이 분분했으나 수상인 김우징(金祐徵)의 적극적인 지지로‚ 사월에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군사 만명을 이끌고 청해로 내려가 힘과 성의를 다해서 수군의 강화에 힘썼다. 얼마 안되어 신라의 수군은 서해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는 36대 혜공왕 말부터 정치가 어지러워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홍덕왕이 왕위에 있는지 11년(A.D.836)의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조정은 다음 왕을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서 싸우게 되었다. 이들 두파는 서로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서 싸웠는데 김양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균정은 김이홍 등에 살해되니 우징은 일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승리한 제융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43대 희강왕이다. 왕은 왕위에 오르자 반대파를 회유하기 위해 대사령을 내리고 김우징 등과도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우징은 부친이 피살된 원한을 잊지못하고 원수를 갚겠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김명과 이홍의 귀에 들어가 김우징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실을 안 우징은 처자와 도망쳐서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 의거하게 되었다. 한편 왕위에 오른 희강왕은 만 1년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 뒤를 이어 김명(金明)이 왕위에 오르자 김양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사정을 알리고 왕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우징은 장보고에게 원조를 청하자 장보고는 정년을 불러 오천 병사를 주어 김양과 함게 우징을 모시고 서울로 진격케 했다. 우징을 모신 김양등은 여러 곳에서 왕군을 격파하고 달구벌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결국 왕은 병사들에 붙잡혀 살해되고 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신라 45대왕인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으로 2천호를 하사했다.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일곱달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46대 문성왕이다. 왕은 장보고의 공을 찬양하는 특별 교서(敎書)를 내리고 그를 진해장군(鎭涇將軍)으로 삼았다. 장보고는 이제 육지의 권한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자기 딸을 문성왕의 왕후로 삼게 할려고 했으나 이 일은 중신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있는 장보고의 모반은 신라 조정에 큰 공포를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연일 회의만 거듭할 뿐 아무 계책도 세우지 못 할 때‚ 염장(閻長)이라는 용사는 거짓으로 반란을 꾀하는 것처럼 꾸며서 청해진으로 도망쳐갔다. 염장은 전에 신무왕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할 때 함께 싸운 장수였으므로 장보고도 그 용맹을 잘 알고 있었고 염장이 반란을 꾀하다가 실패한 소식을 알고 있었는 까닭에 도망해온 염장을 반갑게 맞이했으나 장보고가 술에 취한 것을 본 염장은 갑자기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를 참살해 버렸다. 장보고의 죽음은 곧 신라의 해외발전에 종지부를 찍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골품제도가 사회의 온갖 제도를 규제하던 신라에서 진골의 대표인 왕가와의 혼인을 생각했다는 것만도 하나의 혁명이였다. 이런 뜻에서 장보고의 반란은 역사적으로 의의있는 사건이였다. 그러나 국내의 권력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계속해서 해외발전에의 큰 뜻을 펴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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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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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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