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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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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전세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전세호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1882년 9월 27일 북면 신화리 화동에서 전석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조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자랐으나 장군이 13세때 조모가 세상을 떠나시니 천애고아로 매화리에 있는 일가에서 기식을 하게 되었다. 1905년 11월경 23세 때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음을 듣고 신돌석과 이하현을 찾아 김매정‚ 주락조‚ 최경호‚ 김용욱‚ 장진수‚ 전배근‚ 박병율등 동지들과 손잡고 창의에 가담‚ 강원도 의병 총잠모장 이강년의 휘하에서 중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서면 불영사를 임시 의병사령부 및 훈련소로 정하고 그 해 12월 20일 의병 500명과 군량미 600석을 확보하여 맹훈련하던 중 아장 주락조가 대장 김현규를 사살함에 거사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신돌석 장군은 전세호를 참모겸 도선봉에 임하고 영양군 일월면에서 일본군 80명과 치열한 격전을 하다가 일본군 100여명과 불을 튀기는 싸움 끝에 서로 10여명의 전사자를 냈었고 의병 김상태‚ 한난삼등 4명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을 추격하여 청하에서 1개대대를 섬멸하고 감옥에 갇힌 의병 4명을 구출했다. 그 후 다시 평해를 거쳐 울진으로 진군하니 울진군수 윤우영은 관군 20명을 이끌고 서면 십이령재로 도피하면서 무기고를 그냥 두고 달아났기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일전쟁때 노서아해병이 동해바다 싸움에서 파손되어 30여명이 삼척군 원덕면 월천리에 상륙하였는데 그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삼척군수 정운석이 갖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얻을 생각으로 가던 도중 임원에서 들으니 장호 분토리에 일본 해군 500여명이 어부를 가장하여 해삼잡이를 하고 있다고 있다. 이 정보의 확실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전세호는 자신이 분토리에 가서 알아보던중 누구인가 일본군에게 고발하여 일본군 100명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는 포위망을 뚫고 나가길 고민하다가 모내기 하는 농민들곁에 숨어들어 모내기를 하고있는데 추격하던 일본군이 "의병한놈이 이리 왔는데 못 보았느냐"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못보았다고 하여 가버리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신돌석 장군과 휘하부대를 정비하여 삼척으로 향하니 삼척군수 정운석은 기세에 눌려 부하직원을 거느리고 오분리까지 출영하여 아첨을 떨었다. 군수는 노서아 무기 철연발총 세자루와 권총 세자루‚ 군도 세자루를 내놓으면서 생명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래서 군수를 살려 주었더니 군수는 그 은혜를 저버리고 그날밤 암암리에 묵호에 주둔중인 원주진위대 1개대대를 이끌고 와서 습격하니 배은망덕한 군수의 행위에 모두 이를 갈았다. 삼척 오십천 가에 있는 농촌에서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지고 여기서 신돌석 장군은 영남으로 갔으며 전세호 중장군은 영동지방을 맡아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린 전세호 장군은 독립부대를 이끌고 황지를 경유하여 영양‚ 석포에서 부대 조직을 개편하였다. 그 후 그는 봉화군을 점령하였으나 영월 녹봉에서 크게 참패를 당하였다. 참패후 성익현을 대장으로 관동차의군을 재조직하여 평해를 비롯한 영동각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피신하여 이시영‚ 김창숙등 애국지사의 지도를 받다가 1908년에 고향에 돌아와 매화만흥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2년후 한일합방과 더불어 폐교됨에 북면 부구리로 이사하여 8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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