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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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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담 호 : 청윤/복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오천 출생시기 : 1552년(명종 임자) 상세설명 선생의 자(字)는 청윤(?允) 관(貫)은 오천(烏川) 고려 지주사 정습명(襲明)의 15세손이요‚ 1552년(명종 임자)에 북안면 도천에서 사헌부 감찰 인계(仁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한강 정구(鄭逑)선생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닦고 지산 조 호익(曺?益)과 사귀며 도의를 강론하였다. 1585년(선조 을유) 사마시에 합격하고 효행과 우애가 탁월하다는 칭송이 조정에 알려져 주부(主簿)라는 벼슬이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임진)에 왜구가 침입하여 경성이 함락디어 임금이 위주로 피난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선생은 의리를 다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인즉 국가와 민족의 위급함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하여 드디어 책을 덮고 분연이 일어서서 국난에 몸 바칠것을 결심하고 족제(族弟) 대임(?任) 대인(?仁)과 함께 고을에 나가 둥지를 규합하니 향중의사 60여 인이라 힘을 다해 싸울 것을 맹세하고 의기를 높이 세월 격문으로 호소하니 수일내에 호응하여 모이는 자 900여 명에 이른지라 드디어 진세를 갖추어 5월초에 대동에서 처음으로 적과 싸워 이기고 이 사실을 좌병사 박 진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크게 찬탄하였다. 7월 27일 임진 항전사에 첫 승리를 기록한 영천 복성 대첩을 얻어 대군의적을 섬멸하고 군사요충인 내고장을 우리 손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선생은 이 때 전투 상황을 기록한 영천 복성일기(復城日記)를 남기니 지금까지 가장 귀중한 사료로서 복제선생 실기에 수록되었다. 난리가 안정되자 향리에 도천재(道川齋)라는 서재를 지어 극복당(克服堂)이라 이름하고 제자들을 모아 도덕과 의리를 가르치고 고을에 나아가 선비들과 향사당에서 자리를 같이하고 집에는 가훈이 있어 부자와 형제가 분수의 도리를 지킬것이며 나라에는 법률이 있어 기장과 질서가 유지되는 법이니고을에도 본 받을 만한 것이 없고서는 되겠는가? 하고 향약 10조목을 들어 조금 이나마 미풍양속의 교화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하고 그 의의를 설명하고 매월 향리를 열고 이를 실천에 옮겨게 하니 난리를 겪은 인심뫄 문한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이 바로 잡혀 갔다. 당시 허무러진 향교의 부흥과 임고서원 중건에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남달리 뛰어난 식견과 지혜를 가지고 국가유사시는 의병을 창기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칠수 있는 용기를 다했고 일이 끝나 성공을 거둔에는 공로를 감추고 작상을 사양하여 청렴한 지조를 보였으며 끝내는 초지일관(初志一貫) 후진의 교유과 사회정화에 헌신하며 인애의 정신으로 공자가 말씀하신 지혜‚ 인덕‚ 용기‚ 예의‚ 염치를 지켜 몸소 실천하였으니 선생의 일생에는 진실로 선비의 도리를 다하였다 할 수 있겠다. 1634년(인조 갑술)에 83세로 고령으로 일세를 마치니 후학들이 선생의 덕망을 높혀 당시 서재가 있던 자리에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창건하여 신위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니 축문에 이르기를 "스승을 쫓아 도학을 닦고 난리를 막고도 공로를 사양하였도다. 백대로 내려가며 제향 드릴 제 한 지방 선비들이 모범이 될지로다."하였다. 1868년(고종 5년 무진)에 서원은 훼철되고 지금은 빈 터만 남았으니 뜻있는 선비들의 심금만 울려 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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