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정시

추천0 조회수 80 다운로드 수 3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정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시 호 : 덕원/백우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청주 출생시기 : 1768년(영조 44년) 상세설명 선생은 청주 정씨로 자는 덕원‚ 호는 백우이며‚ 처사 노의 아들로 한강의 8대손이다. 1768년(영조 44년)‚ 수륜면 수성동 갓말에서 태어나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홍경래의 난에 순국했다. 1799년(정조 24년)‚ 무과에 급제하고 그 후 선전관이 되었다가 훈련원 주부‚ 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하고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해 겨울에 홍경래가 광부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니‚ 가산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었다. 홍경래의 도당은 밤에 관청으로 몰려 와서 군수가 잠자는 방으로 들어와 칼을 들이대며 관인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선생은 무릎에 칼을 맞고도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절하니‚ 적은 칼로 그의 오른팔을 쳤다. 팔이 떨어지자 선생은 왼손으로 관인을 집어서 "내 머리는 너희들에게 줄지언정 관인은 줄 수 없다." 하고‚ 다시 거절하니 적은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하여 죽게 하였다. 이 날은 그해 12월 18일이었다. 이 때는 선생의 아버지도 함께 관청 안에 있었는데 적이 선생을 죽인 후에 그의 아버지도 끌어내어 항복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끝내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의 아우인 질은 몸으로 아버지를 막다가 칼을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요행히 목숨만은 붙어 있었다. 선생은 그의 인품이 청렴결백한 사람으로서 관직에 있을 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여 왔다. 한번은 휴가를 얻어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의 부인은 나들이옷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사내 대장부인 당신이 비록 가난하기로서니 안사람의 몸을 가리 변변한 옷 한벌을 장만하지 못한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소?" 부인의 말을 들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내 여러 제수들도 모두 옷이 없으니‚ 어찌 오직 내 아내의 옷만을 장만하리오." 하니‚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다시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선생은 말을 잘 탔다. 관청에는 그가 특히 좋아하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적들은 그 말을 끌러가지고 가서 홍경래의 부하 장수에게 바쳤다. 부하 장수는 이 말을 타고 관군을 대항해 싸우는데 한창 싸우는 도중에 말은 소리를 높여 울면서 위에 탄 적장을 떨어뜨리고‚ 송림 사이를 빠져 관군쪽으로 도망해 갔다. 이 기회에 관군은 적장의 머리를 베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의마라고 하였다. 선생이 순직한 지 28일만에 안주에서 염을 하였는데‚ 얼굴이 살았을 때와 같았으며‚ 고향인 성주로 운구하게 되자 관이 지나가는 연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을 영송하였다. 관청에 홍경래 도당이 습격해 오던 밤에 두 아들이 순직을 각오하고 그 뜻을 아버지에게 알리니 그는 얼굴에 위엄을 갖추고 두 아들에게 "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에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은 백성의 본분이다. 너희는 이 늙은 아비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본분을 위해서 심신을 다 바쳐라." 하고 말하였다. 선생의 아우인 질은 적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자 아버지 대신 나를 죽여라하고 몸으로 막다가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었는데‚ 이 때에 기생 연홍이 통인 한 사람과 더불어 방에 들어가 보니‚ 선생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우인 질‚ 3부자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오로지 질만이 아직 맥박이 뛰고 있으므로 그를 업고 집에 와 간호하여 소생시켰다. 그 후 조정에서는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으나 상처가 다 낫지 않아 얼마 안가서 죽으니‚ 사람들은 '팔창참봉'이라고 하였다. 팔창은 칼에 맞은 상처가 여덟 군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조 임금은 이들 부자가 순직했다는 보고를 받자‚ 매우 애석히 여겨 관을 하사하고 아버지 정노선생에게는 집의 벼슬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이조참판을 증직‚ 1859년(철종 10년)에 다시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충경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정시 선생에게는 병조참판‚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다시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충렬이라 시호하였으며‚ 정주성 남쪽에 그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참고자료 : 성주대관‚ 한국기인열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