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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조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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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조용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조용석 호 : 응천/북계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705년(숙종 31년)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응천(應?)‚ 관향은 창녕이며‚ 임란 때 충효로 순절한 임계 조경온(林溪 曺景溫)선생의 6세손으로 1705년(숙종 31년 을유)에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성풍이 고매하며 남 다른데가 많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부모 곁에서 예절에 대한 것을 배웠고‚ 지조가 굳고 강절하며‚ 하루 종일 꿇어앉아 심학을 닦기도 하고‚ 경서에 통달하였다. 14살 때 아버지 첨추공의 명에 따라 당대 도내에서 손꼽히었던 병애 조선장(屛厓 曺善長)선생에게 수학했다. 병애선생도 이 아이는 장차 학문으로 크게 성취할 것이라 칭찬했다. 그때 마침 멀지 않은 횡계동에서 양수(兩 :정만양‚ 규양‚.....훈수‚ 지수)선생이 강의를 열었다. 이에 양수 선생의 문인이 되어 학문연마에 더욱 전진하여 매산 정중기(梅山鄭重器)‚ 명고 정간(鳴皐鄭幹)‚ 남창 정제(南窓 鄭梯)‚ 동오안처택(桐塢安處宅)‚ 자계 조용한 등과 같은 문인으로 또한 친교로 사귀었으며‚ 당대 영천‚ 신령의 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더욱이 심학을 닦아 그 깊은 경지까지 다달았다. 점차 학문이 완숙하매 거소를 한 때 화북면 구전동에 있는 경림산(경림산) 기슭 별곡(별곡 현‚ 구전동)에서 살다가 다시 화북면 안천동 백학서원(백학서원:퇴계 이선생과 금계 황준량선생을 향사 지냄) 옆으로 옮겨 퇴계선생을 흠모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후 선생은 화북면 삼창동 붕어듬 위에 세워진 현고서당(賢皐書堂)(1736년-1737년에 5간의 집)으로 옮겨 후진을 가르치니 이 지방의 여러 제자들이 모이게 되고‚ 제자들에게 남간 말에 "글을 배움에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그 뜻의 높고 낮음에 따라 성취의 크고 작음이 정해진다. 뜻이 굳세고 겁이 많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감이 있고‚ 뜻을 과거(科擧)에만 두면 과거에 그치고‚ 문장(文章)에 두면 문장에 그치고‚ 성현에 두면 성현을 따르는 사람이 되느냐"고 했다. 또 양죽기(養竹記)를 지어 선생의 의지를 표현하였고‚ 팔공산(八公山)‚ 능산(陵山)‚ 화산(花山)의 기우문(祈雨文:비 내리기를 비는 글)을 비롯 권 충의공 영정을 귀천서원으로 옮겨 봉안 할 때의 고유문과 축문 및 귀천서원에 세워진 충의공 신도비 개기 고유문‚ 금강성 확보 능장 묘도 수갈 고유문 등을 지었고‚ 당대의 여러 문사들의 글월이 북계집에 실려 있다. 향내에 도덕문장으로‚ 또 교육자로 많은 교훈을 남긴 선생은 1774년(영조 50년 갑오)에 병환으로 임종에 다달았을 때 기력이 쇠진하면서도 붓을 잡아 '성‚경(誠敬)'의 두 글자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니 향내는 물론 도내 문장들이 애통하였고‚ 그의 유학은 황무지에 가깝던 이 지방에 끊임 없이 흘러내려 백세에 남겨졌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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