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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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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조준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조준영 호 : 웅부 활동시기 : 근대이후 출생시기 : 1903년(고종 계묘) 상세설명 관향은 한양(漢陽)이요 자는 응부(應?)이니‚ 남주 조승기(南? 趙承基)선생의 손자이며‚ 내은 조인석(內隱 趙寅錫)선생의 셋째 아들로서 1903년(高宗 癸卯) 일월면 주곡동에서 태어났다. 자태(?態)가 헌앙(軒昻)하고 천품이 준수(俊秀)하였으며‚ 일찍이 경성(京城)에 가서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두분 형님이 일본 동경에 유학 갔으므로 귀향하여 본댁에서 양친을 봉양‚ 가사(家事)를 돌보며‚ 험란한 왜정의 풍랑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자중(自重)하였다. 1945년(乙酉) 조국 광복을 맞이한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 위원(施行 ?員)에 피선되어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 후 문경경찰서장에 취임한 것이 관계(官界)의 첫걸음으로서 상주‚ 대구‚ 경찰서장을 역임‚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하였으나‚ 그 해 6월 25일 북괴 불법 남침으로 6.25동란이 돌발하여 국운이 문자 그대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직면하니‚ 조병옥(趙炳?) 내무부장관이 선생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추중(推重)하여 8월 11일 재차(再次)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당시 연합군의 후퇴 작전에서 유일한 명맥이요 보루(堡壘)인 임시수도(臨時首都)대구를 사수(死守)하기로 8월 15일 임시국회에서 결의(決議)했었다. 그런지 사흘후인 8월 18일 아침‚ 느닷없이 대구시내에 경북지사 명의로 된 “소개 명령(疎開 命令)”이 벽보로 나붙었다. 전선(戰線)이 접근해 오니 노유 부녀자(老幼 婦?子)들은 작전에 지장(支障)이 되지 않도록 대구를 떠나라는 권고문이었다.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대구시내는 길목마다 피난 보따리를 울러 메고 우왕좌왕하는 피난민들로 꽉 차있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런 변고(變故)된 까닭인 즉 그 전날(17일)밤 임시 국무 회의에서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기로 의결(議決)한 것이요‚ 이 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경북지사가 소개명령 벽보를 시내 요소(要所)에 붙이게 된 것이다. 소개 명령이 나붙었다는 보고를 들은 조준영(趙俊泳) 경찰국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도청으로 급행하여 도지사실에 마련된 내무부 장관 방에 뛰어 들어 책상을 쾅! 치면서 「“유석(維石) 이런 법이 대관절 어디 있소?”」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대들었다. 계급으로 말하면 장관과 경무관이니 현격한 차이(差異)지만‚ 그땐 자연인(自然人)으로서의 우국지사(憂國志士) 조준영 대 조병옥이었다. 도경 국장이 장관에게 대갈(?喝)하면서 대들고 소개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목에 핏대를 올려 설파(說破)했으며‚ 「안되면 경찰병력만으로 라도 대구를 사수(死守)합시다」하고 울부짖었다. 물론 내무부 장관도 지난밤 임시 국무회의에서 대구 철수를 의결한 한 사람인 줄 알고 대들었던 것이다. 조병옥 장관은 대인답게 귀기울여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나에게 맡겨」하고 일어서 나갔다. 곧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건의(建議)하고 대통령을 설득시켜 대구의 소개 명령을 철회시켰으니‚ 도경국장의 공덕(功德)은 마땅히 구국 활민(救國 ?民)의 은공(?功)이라 할 것이다. 수복(收復)후 경북의 치안을 확보하다가 취임 1년 후에 사직하고 재야인사(在野人士)로 돌아왔다. 그 당시 자유당 독재 부패 정권은 가위(可謂) 국말적 비정(國末的 菲政)으로 민주 조국이 비민주적 도탄(非民主的 塗炭)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가는 위기의식(危機意識)으로 하여 선생은 은인(隱忍)할 길이 없어 제 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6년 9월에 민주당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0월에는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민권 회복 투쟁에 헌신하니‚ 대구는 당시 전국 제 1의 야당도시요 경북은 야당의 웅도(雄道)가 되었다. 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선생은 민주당 공천(公薦)입후보자로서 총 투표수의 3분지 2이상 다수 득표로 압승 당선(當選)되었으니‚ 이는 선거사상(選擧史上) 극히 드문 기록이었다. 독재 부패의 극(極)인 3.15 부정선거로 인한 4.19 혁명 후 허 정 과도정권(許 政 過渡政權) 때인 1960년에 선생은 경상북도지사로 임명되어‚ 비정(菲政)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병으로 인하여 사퇴‚ 1961년(辛丑) 대구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59세이다. 선생은 파란 중첩(波瀾重疊)한 국난(國難)시의 치안 행정관‚ 시정 책임자 및 도백으로서 형극(荊棘)위에 공적을 쌓은 영남의 준재(俊材)이자 우리 고장이 낳은 인걸(人傑)이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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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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