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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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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최응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최응담 호 : 회당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64년(명종 19년) 상세설명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무풍지대를 달리 듯 6월에 이미 경산 지방에 다달았다. 자인에서 최문병 의병대장이 항거하였다면 경산서도 왜병을 그냥 통과시키지는 않았고 의로운 붉은 열혈로 항거하였던 사실이 있었다. 회당 유허비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회당은 흥해인 최응담의 호이다. 왜병이 진격하자 불명예스럽게도 도주해 버린 경산 현령을 대신하여 대장이 된 분이 최응담이고‚ 열세의 의군으로 이 지경을 수호하려고 버티었던 사실이 이 유허비에 의하여 밝혀낼 수 있다. 헌종 때 경산 현령 진성인 이휘재(1842∼1846 재임)가 비문을 찬한 의병장의 유허비는 금세기에 들며 일본 제국주의가 이 강산을 짓밟았을 때 수난의 세월을 겪어야 하였다. 의병대장 최응담은 임란에 왜병과 싸워 전상으로 숨졌고‚ 다시 300년 후에는 그의 공을 기린 비석마저 화난을 입었다. 유허비는 본래 최응담의 생가이었던 안심의 반계동에 세워졌다. 그 자리에 반야월역 청사를 세울 때 일인들은 임진란 때 왜병과 싸운 의병장의 유허비를 옮길 것을 허락할 리 없고 땅속에 묻어버리었다. 유허비는 암흑의 일정 때를 땅 속에서 견디었고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다시 밝은 햇빛을 보아 지금 율하동 저탄장 옆에 세워졌다. 최응담은 1564년(명종 19년) 당시의 경산현 북면 반계동(지금의 대구직할시 동구 율하 1동)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감사를 지낸 최건동의 증손이었다. 아버지에 이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남산에 여막을 짓고 회당이라고 편액을 붙이고는 과거를 치러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임란이 나자 비분 강개하여 설욕할 것을 결의하여 동지 약간인과 맹약하여 원근에 격문을 띄우니 수백명이 모였다. 6월 2일에 경산읍에 나왔다. 현감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경산의 대장으로 추천하였다. 경산읍내에서도 창기하였다. 정변함 3형제‚ 진섬 진엽 형제‚ 승적‚ 남중옥 그리고 박응성 4부자 등이다. 6월 11일 군사에게 술과 고기로 잔치하여 사기를 돋구어 진격‚ 청도와 접경을 이루는 성현에서 접전하여 경산 의병은 적 30여명을 베고 또 말 10마리를 사로 잡았다. 16일에는 남천면 금곡동에 진을 친 적을 공격하였고‚ 적이 일시 연화봉으로 오르자 6월 25일 이를 추격하였다. 경산에서의 왜군을 저지하기 위한 항전은 6월 한달이었다. 최응담은 7월 12일에 하양의 의병(의병장)과 함께 영천 권응수 의병대장의 휘하에 들어갔다. 영천에는 이대 수만명의 적이 웅거하고 있었다. 최문병 신해의 자인 하양 출신 의병장이 대장이 되어 영천성을 공격하였다. 최응담은 500인을 거느려 적 수십을 베었다. 적은 감히 나오지 못하고 아군은 분전 전진하였다. 마침 동남풍이 강하게 불 때 영천성의 화공이 감행되었는데 이때 최응담은 적의 화살 세 대를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였다. 영천성이 회복되고도 계속 진격하여 8월 20일에는 삼려에서 왜장 평의훈을 베었다. 9월에 전공으로 훈련원 부정을 배수하였다. 자인에 있던 적도 이 무렵 경주로 이동하여 합세한 적의 수효는 아군을 훨씬 능가하였고‚ 적은 우세한 신무기 화포로 완강히 항거하니 아군의 희생도 속출하였다. 10월에 다시 적의 화살에 부상을 입었고‚ 부상한 병이 심하여짐을 몹시 안타까와 하였다. 병이 위독하자 휘하의 군병을 권응수 장군에게 보내어 글을 올렸다. "나라를 위한 순절로 과시마혁(전장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체를 사서 후송하는 일)은 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지금 병이 이미 고치기 어려워 공의 뒤를 다시 더 따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하고‚ 측근을 불러 "내가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 것은 군부를 위하여 설욕하려는 것이었다. 편안히 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난리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죽음의 부신이 먼저 오니‚ 이룬 공도 없이 나라 벼슬을 함부로 받는 것이 불가하다"하고 창의일기와 격문 등을 불태우게 하고 초명 "대기"를 응담으로 고쳤다. 그의 행적을 감추려는 뜻이었다고 본다. 1953년 3월 3일 한을 품고 숨지니 30세의 젊음이었다. 용성면 곡란동에서 송상현의 격문을 받고 동래까지 가니 이미 송상현은 전사하였지만 왜적과 싸워 전사한 최팔원은 최응담의 재종질이었다. 충절의 가문이었다. 최응담 14세손 윤점이 율하동에 잉거한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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