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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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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허종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허종 호 : 종경‚종지/상우당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434년(세종 16) 상세설명 공은 양천 허씨(陽川 許氏)로 1434(세종 16)년 상장암(上壯岩)에서 태어났다. 자는 종경·종지라 했고 호는 상우당(尙友堂)이었다.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457(세조 3)년 문관에 급제한 후 세조· 예종· 성종의 3대를 거치는 동안 벼슬은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은 천성이 고매하고 학식이 탁월했으며 식견이 신묘할 지경이었고 특히 용모가 괴걸(魁傑)스러웠는데 이마가 넓직하고 수염이 몹시 아름다웠으며 신장은 11척 2촌이나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큰 산악과 같아 성내지 않아도 근엄함이 남을 압도했고 가까이 접해 보면 온화스럽기가 화한 바람이나 좋은 날씨와 같았다 한다. 세조가 등극한 뒤 문신(文臣)을 천문(?文)과 지리(地理)로 나누었는데 공은 천문에 속해 있었다. 1457(세조 3)년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로 있을 때 월식의 천변이 일었는데 왕께 소(疏)를 올려‚ 언론(言論)의 길을 널리 열 것‚ 이단(異端)을 물리칠 것‚ 경연(經筵)을 자주 열 것 등의 정치 개혁을 제안하자 세조에게 가자(加資: 품계가 높아짐)를 받기도 했다. 뒤에도 국정 전반에 관해 불교 배척 등의 직언(直言: 바른 말)을 자주 올려 세조가 하루는 짐짓 그 속마음을 떠 볼 심산으로 삼엄하게 형틀을 갖추고 선생을 뜰 아래 꿇게 하여 역사(力士)에게 명하기를 내 칼이 칼집에서 다 뽑히거든 치라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때는 세조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감히 누구도 공을 위해 변호할 생각도 못하고 서슬 푸른 세조 앞에서 덜덜 떨고만 있었다 한다. 그런데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임금의 묻는 말에 정정당당하게 대답하였고 임금의 칼이 번뜩이며 뽑혀지는데도 얼굴빛은 평시와 다름이 없었다. "과연 진장사(眞壯士)로다!" 세조는 드디어 공을 가까이 오게 한 뒤 장난이었음을 말하고 술을 내려 그 장한 기개를 더욱 칭찬했다 한다. 공은 문무를 고루 갖추어 1467(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함길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남이(南?) 장군 등과 난을 평정한 후 적개공신에 책록되고 양천군(陽川君)에 피봉되었다. 이듬해는 평안도 관찰사·대사헌이 되었는데 전라도에서 장영기(張永套)가 난을 일으켜 다시 전라도 절도사로 나아가 이를 평정하자 병조판서에 승진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 1471(성종 2)년 좌리공신 4등이 되고 1477(성종 8)년 예조판서로 평안도 순찰사가 되어 압록강 연변의 야인들의 침입을 견제하였으며 평안도 연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적의 진로 중 요해와 산천험이도(山川險易圖)를 임금께 바쳐 국방강화에 힘쓰게 했다. 1487년에는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敞)이 왔는데‚ "참 당당하구려‚ 가슴에 만권의 서적을 감춘 이가 아니면 어찌 이럴 수 있으랴"라고 감탄하며 남에게 그렇게 거만하다가도 공에게는 머리를 숙였다 한다. 1488년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愼) 등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하여 국민보거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1491년에는 동북 방면에 있는 우디거 1천 여명이 침입하여 조산보(造山堡)를 함락하고 서북 방면에서는 건주 야인 1천 5백 명이 침입하여 창주진(昌州鎭)을 포위하자‚ 선생은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어 각도 병사 2만 4천명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女眞) 부락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1492년 우의정에 오르고 2년 뒤인1494년에 돌아가셨다. 선생은 문무를 겸비한 학자요 장군으로서 안에서는 바른말을 서슴없이 하여 이조 초기의 국기(國忌)를 바로 잡는데 진력하였고 밖으로는 여진의 침입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는데 공훈을 세워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는데 마음과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도량이 넓고‚ "부귀는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힘써 구할 것이 못 되고 함부로 분수를 넘으면 재앙이 있을 뿐이다." 고 말한 대로 평생의 생활은 공사에 청렴결백하여 청백리(?白吏)의 표본이었다. 관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성종은 다과를 보내어 위문하여 최후로 남기고 싶은 말을 묻자‚ "다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끝끝내 처음처럼 조심하시옵소서!"했다 한다. 죽음에 성종은 충정(忠貞)이라 시호를 내리고 정무를 멈추어 애도하길 "내가 어찌 대신들을 처벌해서 대우하랴! 그러나‚ 우의정은 북쪽 오랑캐를 치느라 든 병이 이제 도져서 죽음에 이르니 애석하기 그지 없도다."고 애도했다 한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저서에는 상우당집(尙友堂集)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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