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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만나는 한국의 정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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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안동에서 만나는 한국의 정신문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6-04-1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안동에 오는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맞는 동인문(東仁門)과 서의문(西義門)에 적힌 글이다. 실제로 안동에는 조선(1392-1910) 이후 한국 정신문화의 중심인 유교 관련 유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안동의 유교 유적으로 먼저 서원을 들 수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학문연구와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안동의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손꼽는다. ▲ 안동시 도산면의 도산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해 선조의 명으로1574년 세워졌다. 도산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을 기리기 위해 1574년에 건립됐다. 도산서원의 모체는 이황이 1561년 낙향하여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이다. 퇴계 이황은 유학의 주류 학파인 성리학의 본래의 정신인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의 인격수양을 위하여 학문을 함)’과 ‘학이시습(學而時習: 배우며 때로 익힘)’을 강조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퇴계 이황의 인품과 학문적인 깊이를 높이 평가하며 그를 “학자들이 태산 북두처럼 우러러 보았다(명종21년 2월15일)”고 적혀 있다. 학문 수양과 실천적인 삶을 추구한 이황의 뜻은 도산서원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서원의 모든 건물은 검소하고 간결하게 꾸며져 공부하는 선비의 기본자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황은 또‚ 서원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바로 보이는 우물에 대해 ‘물이 깊을수록 맛이 달 듯 학문을 깊이 공부하여 맛을 느껴야 한다’는 뜻의 열정(列井) 우물이라고 이름짓고 서원에 있는 작은 샘의 이름을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간다’는 뜻의 몽천(蒙泉)으로 짓는 등 모든 사물에 학문 수양의 교훈을 부여했다. 그는 제자들이 공부에 힘쓰기를 바라며 기숙사‘농운정사(瀧雲精舍)’의 건물 구조를 ‘공(工)’자의 형태로 직접 설계했다. 아울러 서원 주변의 산과 강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기 수양을 강조하는 교훈이 담긴 시를 여러 편 남겼다. ▲ 도산서원의 기숙사 농운정사의 동편 마루 시습제(時習齋)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이다. 하회마을에 있는 병산서원은 안동이 낳은 대표적인 인물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을 기리는 서원이다. 이곳은 원래 풍산읍 안에 있던 풍산류씨 교육기관인 풍산서당을 병산으로 옮겨지은 것이다. 류성룡의 타계 후 제자들이 그의 위패를 모시고자 존덕사(尊德祠)를 지었고 1863년 철종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사액서원이 됐다. 서애 류성룡은 21세 때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제자로 관직에 오른 뒤 여러 요직을 거쳐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퇴계 이황의 신념인 학문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한 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 ‘충효 이외의 일은 없다’는 유훈은 충(忠)‚ 효(孝)‚ 예(禮)‚ 의(義)를 강조한 유교 본연의 가르침 그 자체이다. 그의 여러 저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의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임진왜란(1592-1598)을 돌아보고 전란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들 수 있다. ▲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봉안된 병산서원. 병산서원도 서원의 기본구성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특히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의 창문위치 등이 비대칭으로 만들어져 각각 아침햇살과 저녁노을을 더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병산서원의 또 다른 특징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미를 들 수 있다. 서원에 들어서 강당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2백 명 이상을 수용하고도 남을 듯한 규모의 누각 만대루(晩對樓)가 서 있다. 누각에 오르면 병산의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낙동강이 흐르는 절경이 연출된다. ▲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산과 강이 만드는 멋진 자연풍광과 조화를 이룬다. 만대루 주변 경관(위)과 만대루의 내부 모습. 류성룡의 뜻은 하회마을의 충효당(忠孝堂)에도 잘 나타나 있다. ‘충효당’이란 이름은 류성룡이‘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것에서 유래한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뒤에 풍산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여생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타계 뒤 그의 자손과 제자들은 서애의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층효당을 지었다. ▲ 충효당은 류성룡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자손과 제자들이 지었다. ▲ 충과 효를 강조한 류성룡의 유훈을 받든 충효당의 현판. 그 밖에 유교 관련 유적으로 와룡면의 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 군자마을을 들 수 있다. 이곳은 조선 전기의 학자인 광산 김씨 농수 김효로 (聾? 金孝虜 1454~1534)와 그의 후손들이 원래 안동 예안에 형성한 집성촌을 전신으로 한다. 퇴계 이황은 김효로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며 묘갈명에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을 가르쳤다. 태도와 행실이 높고 뛰어났다’고 적었다. 김효로의 아들 김연과 김수는 중종(1488-1544) 때 명신으로 활약했다. 그 뒤 광산김씨의 후손들은 번창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등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다. 이들이 살던 마을은 ‘5명의 군자가 살았다’고 하여 ‘군자리(君子里)’로 불렸다. ▲ 안동시 와룡면의 오천유적지는 농수 김효로를 비롯‚ 광산김씨 주요 인물들의 집성촌을 모태로 한다. 오천유적지는 건물의 현판과 내부의 시판 등도 눈여겨볼 만 하다. 특히 유명한 것은 탁청정(濯?亭)과 후조당(後彫堂)의 현판이다. 탁청정은 중종 36년(1514)에 김유(金綏 1491~1555)가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광산 김씨 종택에 딸린 정자이다. 탁청정의 현판은 조선의 명필가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자 내부에는 퇴계 이황을 비롯‚ 유명한 학자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후조당은 선조 때의 문신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의 호 ‘후조당’을 따라 이름 지은 건물이다. 이곳의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진보 이씨‚ 류성룡의 풍산 류씨‚ 오천유적지의 광산 김씨 외에 안동 김씨‚ 안동 권씨 등 조선시대 명문 가문의 종택이 다수 모여 있다. 문중마다 자체적으로 장판각 등 목판보관소를 갖고 있다. 이들이 남긴 시문집 등 저서는 목판 6만5천 여 점이 넘으며 대부분 유교의 가르침을 주로 하고 있다. 이 목판 기록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으며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윤소정 코리아넷 기자 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arete@korea.kr ▲ 오천유적지의 광산김씨 집성촌에 있는 탁청정(위)과 후조당의 현판은 각각 석봉 한호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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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ci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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