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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금관총 발견 85주년 기념 특집전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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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경주]금관총 발견 85주년 기념 특집전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06-09-01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게시글 상세 보기를 등록일‚ 조회수‚ 기간‚ 담당자‚ 등록일‚ 조회수로 나타낸 테이블 입니다. [경주]금관총 발견 85주년 기념 특집전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 등록일2006-09-01 조회수1985 담당자 학예연구실 함순섭 (s8r+14+JIKL5) 금관총 발견 85주년 기념 특집전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김성구)은 2006년도 세 번째 특집전시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를 8월 29일(화)부터 10월 15일(일)까지 미술관 로비에서 개최한다. 올해 특집전시는 『최초의 반려동물. ‘개’』『탄생불과 사리갖춤』을 이미 실시하였으며‚ 11월중에 네 번째로 『신라의 소리-태평성대를 꿈꾸며』를 개최할 예정이다. 특집전시는 상설전시나 대규모 기획전시로 다루기 곤란한 작은 주제나 시의성이 반영된 주제를 적지만 의미 있는 유물을 대상으로 설명적으로 풀어나가는 전시이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고고학 조사는 주로 경주와 평양에 집중되었다. 1906년부터 시작된 신라고분 조사는 금관총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921년 9월에 경주 노서리에서 주막을 하던 한 주민이 주막을 넓히기 위해 공사를 하다가 신라고분을 훼손하였다. 이 고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이 신라무덤은 ‘금관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금관총 발견은 이후 신라고분 연구의 기점이 된 긍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이를 통해 제국주의 일본이 국제적으로 선전에 활용한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번 특집전시는 금관총 발견 경위와 의미를 85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되짚어보고자 준비하였다. 금관총 출토 금관과 금제허리띠장식을 넓은 공간에 따로 전시하여 찬찬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람객들이 알 수 없었던 발견 경위와 의미를 패널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보고서와 금관총 표석‚ 보고책임자였던 하마다코사쿠[濱田耕作]를 추모하던 비석 등도 찾아내어 전시한다.     금관총 발견 경위 경주읍성 남문 밖 옛 무덤으로 둘러싸인 두두룩한 언덕에 주막이 있었다. 1921년 9월 어느 날‚ 주인장은 날로 번성하는 주막을 넓히기 위해 뒤뜰의 둔덕을 깎아내었다. 그러기를 며칠이 지난 9월 24일에 아이들이 서너 그릇분량의 심상찮은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우연히 지나가던 일본순사가 이를 보았다. 아이들을 추궁하여 공사현장을 찾은 일본순사의 눈앞에는 황금유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경주경찰서장은 황당하게도 몇몇 일본인 유지들과 함께 27일부터 30일까지 모든 유물을 거두어 경찰서로 옮겨버렸다. 연일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 발견’이라는 보도가 터져 나왔고‚ 뒤늦게 현장을 찾은 조선총독부 소속 고고학자들은 이미 수습된 유물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85년 전에 우연히 발견된 황금유물은 기록으로 전하던 ‘황금의 나라 신라’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강점기에 벌어진 이 사건은 신라의 옛 무덤을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올리게 하였고‚ 연이은 발굴조사의 계기가 되었다.   금관총 발견의 의미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명분으로 100년 전인 1906년에 이마니시류[今西龍]로 하여금 신라의 옛 무덤을 처음 조사하게 하였다. 이후 1910년대까지 몇 차례의 발굴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독특한 신라의 옛 무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에 우연히 발견된 수많은 황금유물은 한꺼번에 모든 판단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20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일본제국주의도 황금유물이 솟아진 신라의 옛 무덤을 경쟁적으로 국제사회에 선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옛 무덤은 금관이 발견되었다는 의미로 ‘금관총(金冠塚)’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칼라사진과 영문설명을 곁들인 보고서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보고서를 만든 이는 하마다코사쿠[濱田耕作]와 우메하라스에지[梅原末治]였다. 우메하라스에지는 1924년에 금관총 가까이에 있던 금령총(金鈴塚)과 식리총(飾履塚)을 발굴하여 신라의 독특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따라서 금관총의 발견은 신라의 황금문화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던 계기였으며‚ 신라의 옛 무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발판이 된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라금관(新羅金冠) 신라 금관은 나뭇가지 모양으로 세움장식[立飾]을 도안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신라 금관은 맞가지[對生枝] 세 개와 엇가지[互生枝] 두 개의 세움장식이 조합되어 있다. 엇가지는 사슴뿔을 본뜻다고도 한다. 상징 측면에서 나뭇가지와 사슴뿔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같이 의미를 지닌다. 신라 금관은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황남대총 북분(皇南?塚 北墳) 금관에서 비로소 완성되며‚ 금관총(金冠塚) 및 서봉총(瑞鳳塚)의 금관과 더불어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특징을 지닌다. 이후 만들어진 금령총(金鈴塚)과 천마총(?馬塚)의 금관은 맞가지의 마디가 4단인 특징을 지닌다. 즉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금관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것에서 4단인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점점 빽빽해지고 화려한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왕은 한때 제사장이었으며 이후에도 국가제사를 주관하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천년의 나무를 상징하는 듯한 신라 금관은 통치자이자 제사장인 신라왕과 그 왕족의 성격에 부합하는 의장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신라의 허리띠꾸미개[腰帶裝飾] 허리띠꾸미개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具]‚ 허리띠 끝에 다는 띠끝꾸미개[帶端裝飾]‚ 가죽 또는 비단 허리띠의 겉면을 꾸몄던 띠꾸미개[?板]‚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드리개[腰佩]로 구성된다. 신라에서 처음 쓴 귀금속제 허리띠꾸미개는 용무늬를 맞새김한 띠꾸미개[龍文透彫?板]로 여겨지는데‚ 이는 고구려로부터 도입된 의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용무늬 띠꾸미개와 거의 동시에 도입된 세잎무늬를 맞새김한 띠꾸미개[三葉透彫?板]가 고유 의장으로 정착되어 보다 널리 쓰였다. 신라의 허리띠꾸미개에는 질병을 다스리는 약병 또는 향수병‚ 풍요와 불사(不死)를 상징하는 물고기 장식‚ 용무늬를 새긴 장식‚ 곱은옥‚ 숫돌 등을 매달아 드리운 특징을 지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경주]금관총 발견 85주년 기념 특집전시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가 모습을 드러내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1유형)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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