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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추모경찰' 산청 생비량 전투 전사경찰 2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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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9월 추모경찰' 산청 생비량 전투 전사경찰 20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3-09-05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9월의 추모경찰 생비량 전투 전사자 구회상 지서상 등 20명 1951년 9월 1951년 9월 당시 경찰의 임무는 크게 3가지‚ 공비 격멸‚ 추수 보호‚ 군경 협조입니다. 맞서싸울 경력도 무기도 부족했지만‚ 후방전투에 임하는 사명감만큼은 군인과 다름없었습니다. 각 지역에 침투해있던 빨치산들은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장기전 체제로 조직을 정비하고 소위 "해방구"를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전투를 끈질기게 이어나갔습니다. 경찰은 후방치안의 사명위에 무장공비들과 맞서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1‚344명의 경찰 희생도 있었습니다. 1천명 대 100명. 산청서 생비량 지서 전투. 지리산 일대는 남부군 57사단이 맡고 있었습니다. 사단장 이영회 휘하 병력은 1천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전남‚ 경남 각지에 수시 출몰하며 침략을 일삼았습니다. 9월 13일 밤 12시. 57사단 공비들은 산청군 일대를 점령할 목적으로 산청군 도리 생비량 지서를 둘러싼 산능성이에 포진했습니다. 모두 60mm 박격포와 경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우선 외부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한 후‚ 박격포 발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생비량 지서는 지서장 구회상 경사와 경찰관‚ 의용경찰대원 등 100명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쾅쾅쾅! 무수한 포탄이 지서로 집중 낙하되는 것과 동시에‚ 1천명의 공비들이 개미떼처럼 지서를 향해 밀려들었습니다. 면창고에 불을 지르고 민가까지 약탈했습니다. 경찰관들은 이들을 막아내며 필사적으로 버텼습니다. 하지만 수적 열세와 실탄부족으로 처절한 전투는 2시간만에 끝이 났습니다. 공비들은 지서장 구회상 경사‚ 김종석 순경‚ 박명학 순경‚ 김진우 순경‚ 이희우 순경 등 경찰관 5명과 의용경찰 15명을 생포했습니다. 생포 경찰관들은 인민재판의 제물로... 9월 14일 날이 밝자 공비들은 감금했던 경찰관과 의용경찰들을 생비량 양천강변으로 데려갔습니다. 소위 인민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각본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공비들은 경찰관들을 주민들 앞에 세우고 멋대로 작성한 죄목을 읽어내려갔습니다. 결국 "악질 반동분자"라는 선고를 내린 후 20명 전원을 죽창과 낫으로 학살했습니다. 탈환 생비량 지서 사건을 보고받은 산청경찰서는 경찰관 400명과 육군 대대병력을 규합하여 탈환작전을 전개했습니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공비들을 마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비참한 동료들의 주검 앞에서 분노와 죄책감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추모 이 사건은 9.13 생비량 지서 전투로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산청군과 주민들은 공비의 침략에 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 격전지 인근에 위령탑을 세워 매월 6월 추모의 예를 표하고 있으며‚ 생비량지서는 지금도 생비량치안센터로서 주민들의 안전을 굳건이 수호하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찰이기에 뛰어들어야 했던 전투와 경찰이기에 맞아야 했던 죽음. 이 땅의 산과 들에서 초연히 맡은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된 선배들께 존경과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경찰청 복지정책담당관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police.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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